동사에 주어 일치가 생기고 유지되는 이유? [일상의 언어유형론과 기능주의 언어학]
머리를 자를 때의 일이다. (‘머리를 자르다’는 고빈도 연어인 것 같은데 ‘머리카락을 자르다’는 이런 자리에서 잘 안 쓰는 듯..? 떠오르는 이미지가 좀 다르다.)
매달 가는 곳이라서 머리를 잘라 주시는 분이 내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알고 계셨고, 본인도 곧 결혼하실 예정이시라 해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했다.
그런데 미용실에 틀어져 있는 음악 소리, 드라이기 소리, 바리깡 소리가 계속 섞이니까, 상대방이 말하는 문장의 서술어는 얼핏 들리는데 그 문장의 주어가 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 술을 안 좋아해서 돈도 아끼고 좋(다?)’와 같은 말들을 들을 때 결혼을 준비하는 헤이디자이너 본인의 커플이 그렇다는 말인지 아니면 머리를 잘리며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나 우리 부부가 그렇다(그렇냐)는 말인지 곧장 파악이 안 됐다. 말이 잘 안 들릴 때 으레 그러듯이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끄덕끄덕하는 한편 방금 한 말이 질문이 아니었기를(설명의문문이 아니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을 겪고 보니 ‘아, 이래서 동사에 주어 일치가 생기는구나/유지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동사에 있는 주어 일치란, 동사 바깥의 다른 곳에서 주어가 한 번 표현되(ㄹ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사 안에 주어의 정보를 (한 번 더)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머리를 자를* 때 스와힐리어나 러시아어나 터키어로 (또는 라틴어, 스페인어, 불어 등으로) 대화를 했다면, 소음 때문에 헤어디자이너 님 말에서 주어를 잘 못 들었더라도 서술어에 나타나는 주어 인칭수 일치 정보를 통해 주어가 1인칭 복수(헤어디자이너 님 쪽 커플)인지 아니면 2인칭 복수(우리 부부)인지를 한 번 더 파악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능동태인 점이 흥미롭다
즉 서술어에 나타나는 주어의 인칭수 정보는 의사소통을 성공시키기 위한 하나의 안전장치이고, 이런 안전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데에는 다 기능적인 동기가 있는 것이다. (기능주의 언어학!)
https://blog.naver.com/ks1127zzang/222760592516
그럼 그런 장치가 없는 한국어나 영어 같은 언어는 왜 있는 걸까?
(한국어는 주체높임의 ‘-시-’라는 유사 장치가 있지만 내가 혼란을 겪은 상황에서처럼 화청자 간의 관계에 따라 안 쓰기도 하고, 영어는 1복 vs 2복 주어의 동사 형태가 같음)
당장 떠오르는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귀찮으니까.
언어사용자는 경제성을 추구한다. 말할 때 에너지를 덜 쓰고 싶어한다. 주어가 뭔지 이미 말했거나 맥락상 추론가능할 걸로 판단되는 상황에서, 서술어를 말할 때 주어가 뭐였는지 굳이 다시 신경써 가며 입을 더 움직이는 일은 번거로운 노릇이다.
또 주어의 인칭수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개의 활용형을 외우고, 말을 할 때 특정 활용형을 다른 활용형과 구분하여 선택하는 정신적 에너지도 굉장할 것이라는 점을 외국어 학습 경험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 단순히 ‘귀찮아서’와는 별개로, 영어의 동사에서 주어 인칭수 일치표지가 대거 사라진 데에는 음운론적인 요인이 관여했다고 들었던 것 같다. 동사에서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어말 비강세모음의 약화/탈락이 진행되었다고 했었나? 영어사 공부를 하고 싶다.
요컨대 인간의 언어에서는,
(1) 듣는이에게 주어가 뭔지 좀더 확실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동기(-> 주어 일치 O)와
(2) 화자 자신이 말을 좀 편하게 하고자 하는 동기(->주어 일치 X)가
서로 trade-off 관계에 있으므로
의사소통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계속 (1)와 (2)를 측정하여 적당한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 선이 되도록 저마다 동사에 주어 일치 표지를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trade-off 상황에서 각 언어 공동체가 찾아낸 타협점이 어디 있는지에 따라 주어 일치의 유형을 대별하자면,
- 명확성을 위해 주어 일치 표지를 쓰되 경제성을 위해 주어 일치 표지는 발음하기 편한 짧은 형식으로 만드는 유형(위에 든 예에서 터키어의 2인칭 복수를 제외하면 전부 자음 하나, 모음 하나 정도로만 이루어져 있다.)
- 경제성을 위해 주어 일치 표지를 쓰지 않되 명확성을 위해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요소를 쓰는 유형(한국어 ‘-시-’)
- 경제성을 위해 서술어에는 주어의 정보를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되 명확성을 위해 다른 곳에서 주어를 좀더 확실히 보여주는 유형(주어 생략이 보통은 불가능한 영어 등)
이상과 같은 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껏 이야기한 내용을 언어유형론에서 말하는 언어의 보편성(language universal)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1) 어떤 언어가 동사에 주어의 정보를 표시한다면, 주어의 정보를 표시하는 부분은 짧다. ('짧음'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다시 논해야 하겠지만... 절대적 임계점을 가진 거라기보다 평균과 분산이 있는 분포를 생각하면 좋겠다.)
(2) 어떤 언어가 동사에 주어의 정보를 표시하지 않는다면, 그 언어에서는 동사 바깥의 어딘가에 주어를 표시한다. (문장 안에 주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청자가 맥락으로부터 주어를 복원해 낼 수 있다.)
이러한 보편성의 설명력은 아래와 같은 언어 유형을 배제하는 데에 있다. (Whaley 1997:33, ... the benefit of implicational absolute universals is that they eliminate one possible language type.)
(1') 동사에 붙는 주어 일치 표지가 매우 긴 언어. 또는 한 문장 안의 모든 단어에 그 문장의 주어를 나타내는 표지를 붙이는 언어
(2') 청자가 맥락으로부터 주어를 전혀 복원해 낼 수 없는 경우에도 문장 안에 주어를 전혀 표시하지 않는 언어 (이건 좀 당연하게 느껴지긴 한다.)
한편 위에서 제안한 보편성 (1)과 관련하여, 아마도 주어 일치 표지의 강세나 길이에 따라 주어의 생략 가능성 또는 생략 빈도가 달라질 듯하다.
동사에 붙는 주어 일치 표지가 강세를 받지 않는 한두 개 음절로만 되어 있다면 주어는 덜 생략될 것이고,
동사에 붙는 주어 일치 표지가 강세를 받거나 여러 음절로 되어 있다면 주어는 좀더 자주 생략될 것이다.
관련한 유형론 연구나 실험 연구 같은 게 있는지 모르겠다.
연구를 한다면 여러 언어 간의 비교를 할 수도 있겠고, 한 언어 안에서 인칭수마다의 주어 생략 빈도 비교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후자의 예를 들자면 이런 얘기다.
스페인어에서 현재시제 직설법 단수형 동사 어미들은 모두 강세를 받지 않고 onset 자음은 없으며 coda 자음도 없거나 딱 하나만 있는 매우 단순한 -V(C) 형식으로 되어 있는 반면,
현재시제 직설법 1, 2인칭 복수형 동사 어미들은 강세를 받고 심지어 1인칭 복수형 어미는 음절이 두 개나 들어가는 -V́mos 형식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어간 교체가 없는 규칙 활용에서라면 다른 모든 조건이 같을 때(ceteris paribus) 1/2인칭 복수형에서 주어 생략이 가장 빈번하지 않을까 싶다. 스페인 스페인어에서는 원래 주어 생략이 잦은 반면 멕시코 스페인어에서는 주어가 덜 생략된다고 들었는데, 그런 방언에서도 1/2인칭 복수형 대명사는 생략되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단순히 비교해 봐도 후자는 매번 다 말하기에 너무 번거롭다.
그러니까 노란 부분에서 'yo'('나')를 없애고 '-o'(1인칭단수 표지)만 남기는 건 다소 위험부담이 있는 생략인 반면,
파란 부분에서 'nosotros'('우리')를 없애는 것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으면서도 화자의 편의를 매우 증진시키는 생략이라는 것이다.
+ 한국어는 서법이나 증거성(?)이 인칭수일치의 빈칸을 채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먹었어.’는 주어가 1인칭인 경우가 아닌 경우보다 많을것 같고,
‘먹었어?’는 주어가 2인칭인 경우가 아닌 경우보다 많을 것 같고,
‘먹었대?’는 주어가 3인칭인 경우가 아닌 경우보다 많을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코퍼스에서 직접 확인해 보면 좋겠다. (엄청난 양의 수작업이 필요할 듯...)
(거의 tautological하게 되어서 허무한 본문의 보편성(2)와 관련.)
같이 보면 좋은 글
https://m.blog.naver.com/ks1127zzang/222760592516
+ 언어유형론의 함의적 보편성(implicational universal)에 대해서는 Whaley(1997)의 언어유형론 개론서 Introduction to Typology: The Unity and Diversity of Language의 제1장을 참고하라.
+ 원래 글의 제목을 ‘언어덕후의 잡상雜想’이라고 하려 했는데 내용을 그다지 잘 못 드러내는 것 같아서 바꿨다. ‘잡상雜想’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지만 구글에 검색해 봤을 때는 용례가 있는 ‘생산적’인 단어인 것 같다. (‘생산적’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논문이 나올 정도로 ‘생산적’은 용법이 여러가지인데, 여기선 수어 문법에서 말하는 ‘생산적 수어’의 ‘생산적’과 비슷한 의미로 썼다.)
+ 아래 링크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계량-계산-실험 언어학> 방의 방장님께서 알려주신 논문인데, 세계 언어들의 어순이 이 글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동기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뭔가 뭔가 정교한 계산으로 밝히고 있는 것 같다.
https://www.pnas.org/doi/full/10.1073/pnas.1910923117#sec-4
Hahn, M., Jurafsky, D., and Futrell, R. (2020). Universals of word order reflect optimization of grammars for efficient communication. Proc. Natl. Acad. Sci. U.S.A. 117, 2347–2353. doi: 10.1073/pnas.1910923117
+ 본문에서 다룬 주제에 대해 좀더 포괄적이고 깊은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께서는
Whaley(1997)의 언어유형론 개론서 Introduction to Typology: Unity and Diversity of Language의 9장 Case and Agreement Systems와,
WALS(World Atlas of Language Structures)의 제23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링크)
https://wals.info/chapter/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