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의도치 않게 불을 켠 채로 잠이 든다. (이 글에서 이야기했듯)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이 습관은 덜 고쳐져서,
가끔 아내가 먼저 잠들면 옆에서 스마트폰을 만지거나 책을 보다가 불을 미처 못 끄고 잠들어 버리곤 한다.
몹시 미안하게도, 그럴 때는 아내가 새벽에 깨서 불을 끄고는 다시 잠든다.
아침에 일어나서 상황 파악을 하고 나면, 내 부주의 때문에 나 자신도 아내도 제대로 푹 쉴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자책이 내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이면 아내는 나를 원망할 법도 한데, 자기는 불을 켠 채로 자는 것에 대해서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늘 무덤덤하게 넘겨 준다.)
'불 키다' 글을 썼던 날도 딱 그런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날이 설날이었다. 날짜 감각이...)
'몇 시에 잠든 걸까', '나 때문에 우리는 과연 몇 시간의 수면을 손해본 걸까'라는 자책을 계속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내게 아내가 한 마디 해 주었다.
"근데 불은 내가 되게 빨리 껐어!" (verbatim)
실제로 잠든 시각이 몇 시고, 아내가 일어나 불을 꺼 준 시점이 몇 시였든지 간에,
그리고 아내가 정말로 그 시각을 기억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그 말에서는 불안 많은 나를 안정시켜 주려는 배려가 느껴졌고, 실제로 큰 효과가 있었다.
정말이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어(학) 덕후로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근데 불은 내가 되게 빨리 껐어!"
여기서 '불을 빨리 껐다'라는 말은
새벽에 깨어난 시점부터 불을 끈 시점까지의 시간이 짧았다는 뜻도 아니고,
재빠른 동작으로 불을 껐다는 뜻도 아니다.
불을 빨리 껐다는 것은, 이를테면 새벽 네 시나 다섯 시가 아니라 한 시나 두 시쯤 껐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맥락에서 '빨리'는 대략 '일찍', '일찌감치'라는 뜻일 것이다.
한편 '?근데 불은 내가 되게 일찍 껐어!'는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불은 내가 되게 빠르게 껐어!'는... 중간쯤? ... 직관 붕괴가 온다.
어쩌면 내가 잠든 시점으로부터 아내가 불을 끈 시점까지의 시간 간격이 짧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런 의미로는 '금방'이 좀더 전형적인 듯도 싶다.
그럼 영어로 '불은 내가 빨리 껐다'고 할 때는... early도 fast도 아니고 soon인가?
하여튼 한국어의 부사 '빨리'는 fast라는 뜻도 있지만 early라는 뜻도 있고,
그 어근이 되는 형용사 '빠르(다)' 또한 비슷한 다의성을 지니고 있다.
(한자로는 快~速 vs 早? 일본어 はやい는 速로 쓸 때도 있고 早로 쓸 때도 있는데, 아마 이러한 다의성 때문인 듯.)
나 자신도 early의 의미로 '빨리'나 '빠르다'를 자주 사용하지만, 왠지 이러한 용법이 표준적인 것은 아닐 줄 알았다.
'빠르다'와 '빨리'의 핵심 의미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고, 시점이 이르다는 것은 주변적인 의미라는 인식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확인해 보니 '빨리'나 '빠르다'의 early 의항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어엿하게 올라가 있다.
이처럼 '빨리'나 '빠르다'는 표준어에서도 나의 개인어에서도 분명히 fast와 early의 다의성을 지니고 있다.
위 사진에 나오는 표준국어대사전 예문들에서는 '빨리'를 '일찍'으로, '빠르다'를 '이르다'로 바꿔도 뜻이 거의 똑같다.
어떤 일이 빨리(fast) 진행되면 그 일이 끝나는 시점은 이를(early) 테니 이런 다의 관계가 나타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 확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교량 문맥에서 어떤 인지 과정을 거쳤을지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듯.)
그러면 '빠르다'의 반의어인 '느리다'와 '이르다'의 반의어인 '늦다'는 어떨까?
'빠르다'를 '이르다'로 바꿔도 괜찮을 때가 많은 것처럼, '느리다'를 '늦다'로 바꿔도 괜찮을 때가 있을까?
직관적으로 느끼기에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확인되는 바로도,
'느리다'가 '시점이 늦다(late~晩)'의 의미로 쓰이는 일은 없다.
오히려 놀랍게도,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늦다'의 의항으로 slow의 의미가 실려 있다.
이렇게 '늦다'를 slow 의미로 사용하는 용법의 경우 내 개인어에서는 그다지 활발히 쓰이지 않는 듯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표준국어대사전의 예문이 그렇게까지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정리하자면
'빠르다'와 '이르다'에서는 속도 어휘가 시점 의미를 같이 나타내고 있지만,
'느리다'와 '늦다'에서는 반대로 시점 어휘가 속도 의미를 같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의미 지도로 나타내어 보면 이렇게 된다.
이러한 비대칭에 대해 어떤 설명이 가능한지/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코퍼스를 통해 확인해 보니 빈도가 유관해 보인다.
내 직관상 '빠르다'는 고빈도 어휘인 반면 '이르다[早]'는 상당히 저빈도로만 쓰이는 어휘 같다.
'이르다'가 저빈도 어휘인 것과 '이르다'를 쓸 만한 자리에 '빠르다'가 쓰이는 것은
좀 순환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이르다'를 쓸 자리에 '빠르다'가 쓰이면 '빠르다'가 '이르다'보다 고빈도가 됨)
빈도 차이가 유발되는 다른 요인도 있을 테니 어느 정도 설명적으로 서로 연관이 있는 듯싶다.
원래는 대충 이렇게만 쓰고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실제로 빈도상 차이가 있을지 궁금해져서,
결국 전에 몇 번 그랬듯이 세종말뭉치 현대문어 자료에서 직접 검색해 보았다.
약 900만 어절의 세종코퍼스 현대문어 말뭉치에서
'빠르다'는 2,505회 vs 형용사 '이르다'는 444회,
'빨리'는 2,437회 vs '일찍'은 938회,
'느리다'는 778회 vs '늦다'는 1,670회 검색되었다.
원래 '느리다'와 '늦다' 사이에는 큰 빈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코퍼스를 통해 빈도를 보고 나니 '늦다'가 slow 의미로 쓰인다는 게 새삼 납득이 된다.
한편 이렇게 속도(빠르다/느리다)와 시점(이르다/늦다)이 서로 같은 어휘로 표현되는 것은 전세계 여러 언어에서 꽤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위에서 일본어의 はやい를 예시했다.)
그러한 경향성은 의미 지도에 대한 글에서 소개했던 공어휘화(colexification) 데이터베이스 CLICS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공어휘화'라는 말은 다의어와 동음이의어를 아울러, 두 가지 의미가 하나의 언어 형식으로 표현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다른 연결에 비해 짙지는 않지만 (즉 다른 개념 쌍에 비해 공어휘화 케이스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한국어 '빠르다'의 경우처럼 FAST와 EARLY를 같은 어휘로 나타내는 언어는 상당수 존재한다.
'FAST'라는 뜻과 'EARLY'라는 뜻을 하나의 단어로 나타내는 사례는 아래와 같다.
'late'와 'slow'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다.
CLICS에서 정의하는
LATE는 "Towards the end of a time period"이고,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자'에서의 '늦다' 같은 걸까?)
BE LATE는 "To be later than the expected time"이다.
'늦다'와 '느리다' 의미를 둘 다 나타내는 단어의 목록에 중세 영어 'late'도 들어 있다는 점은 신기하다.
내 L2 지식과 조금의 검색 결과로부터 미루어 볼 때 현대 영어의 'late'에는 아마 '느리다'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현대로 오면서 분화가 된 모양이다.
한국어의 '빠르다'와 '늦다'도 추가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아쉽게도 CLICS의 한국어 데이터는 몹시 엉망인 상태이다.
+ 영어 윅셔너리의 일본어 おそい 항목은 이렇게 되어 있다.
표기는 아마 晩보다 遲가 더 흔한 것 같으니 한국어와는 반대의 케이스로 보인다.
우리 표준국어대사전도 대략 비슷하게 되어 있지만, 의항별로 반의어의 표기를 달리하는 점이 재미있다.
그런데 delayed라는 의미로는 또 晩이 아니라 遲(遅)를 쓴다니...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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