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법 12

'빠르다~이르다'와 '느리다~늦다'의 비대칭 - 코퍼스, 의미 지도와 CLICS, 속도와 시점의 다의성

나는 가끔 의도치 않게 불을 켠 채로 잠이 든다. (이 글에서 이야기했듯)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이 습관은 덜 고쳐져서, 가끔 아내가 먼저 잠들면 옆에서 스마트폰을 만지거나 책을 보다가 불을 미처 못 끄고 잠들어 버리곤 한다. 몹시 미안하게도, 그럴 때는 아내가 새벽에 깨서 불을 끄고는 다시 잠든다. 아침에 일어나서 상황 파악을 하고 나면, 내 부주의 때문에 나 자신도 아내도 제대로 푹 쉴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자책이 내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이면 아내는 나를 원망할 법도 한데, 자기는 불을 켠 채로 자는 것에 대해서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늘 무덤덤하게 넘겨 준다.) '불 키다' 글을 썼던 날도 딱 그런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날이 설날이었다. 날짜 감각이...) '몇 시에 ..

언어학 2024.02.11

"불 키고 자면 안 돼요" - '키다'는 왜 생겨난 걸까?

어렸을 때부터 내게는 아주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불을 켜 두고 침대에 엎드려 밤 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거나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뭘 하다가 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면 다음 날이 무척 피곤하다. 아무리 많이 자도 제대로 잔 것 같지가 않고, 왠지 모르게 몸 여기저기가 아픈 느낌이 든다. 어제도 잠들기 전에 미처 불을 끄지 못했다. 예전에 구매했던 고 가쓰히로(오승호) 작가의 소설 을 요즘 열심히 읽고 있는데, 어제도 밤 늦게까지 그 소설을 보다가 그만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왠지 모르게 몸이 찌뿌둥하고 피로가 덜 풀린 느낌이 든다.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 불을 안 끄고 자면 정말 몸에 좋지 않을까? 검색..

언어학 2024.02.10

ChatGPT에게 '음운 규칙 프로그램'의 코딩과 디버깅을 시켜 보았다

뒤늦게지만 ChatGPT에게 코딩을 시켜 보았다. 명령어 하나하나마다 어떤 기능을 하는 건지 설명하는 주석도 잘 달아 주고 아주 친절하게 짜 준다. 처음엔 어느 정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는 것 같지만, 간단한 말로 피드백을 주면 알아서 잘 반영하고 디버깅한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놀랍다. 무료 버전(3.5)인데도 말을 잘 알아들어서 신기하다. 언어와 매체 국어 문법 시간에 익히 배워 알고 있듯이, 한국어의 예사소리(평폐쇄음과 평파찰음)는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음으로 바뀐다. 예를 들어 /ㄱ/은 어두에서 무성파열음 [k]로 실현되지만, 유성음 사이에서는 유성파열음 [g]로 실현된다. 이 규칙을 적용하여, /k/ 등을 받아서 그 앞뒤에 있는 음소가 유성음인지 체크하고 그들이 유성음이면 /k/..

언어학 2024.01.20

[언어유형론]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분석어)

'언어유형론'은 언어의 유형에 관한 학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가 사람을 성격에 따라 16개의 유형으로 나누는 것처럼, 언어도 여러 기준에 의해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다. MBTI 검사에서 사람의 성격 유형이 '지아는 INFP, 서아는 ESTP, ...'하는 식으로 나뉘듯이, 언어유형론의 접근을 대략 말하자면 '한국어는 A유형, 영어는 B유형, 중국어는 C유형' 하는 식이 된다. (+ 다만 언어의 유형은 16개 MBTI 유형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한 언어가 어느 유형이다 하고 말하는 것도 마냥 쉽거나 100% 정확한 일이 아닐 때가 많다.) 여러 MBTI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 각자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구경하는 일이 재미있듯이, 각 유형에 속하는 언어가 서로 어떤 특징을 ..

언어학 2023.12.16

내용어와 기능어,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 - '대명사'는 어느 쪽?

영어 문법을 배우다 보면 '내용어content word'와 '기능어function word'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다. 그 개념은 국어 문법 시간에 배우는 '실질형태소', '형식형태소'의 정의와 아주 흡사하다. 얼마나 비슷하냐면, 영어 위키백과 'Content word' 문서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어휘형태소'이고 'Function word' 문서의 한국어 번역본은 '문법형태소'일 정도다. (다만 내용어와 기능어는 일단 단어word에 대한 분류이므로 접사 등에 대해서 적용할 수는 없다.) 한국어의 '사람', '배', '크-', '작-', '먹-', '자-' 등이 실질형태소이듯이 영어의 'person', 'pear(ㅋㅋ)', 'big', 'small', 'eat', 'sleep' 등은 내용어이고, 한국어의..

언어학 2023.12.12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 - 국어 문법 수업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 생각해 보기

고등학교에서 언어와 매체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실질형태소(어휘 형태소 lexical morpheme)와 형식형태소(문법 형태소 grammatical morpheme)를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영문법에서 배우는 '내용어content word'와 '기능어function word'도 비슷한데,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 ‘실질형태소’는 실질적 의미가 있는 형태소이고, ‘형식형태소’는 실질적 의미가 거의 없고 형식적 의미만 있는 형태소이다. 구체적 의미 내용의 양을 따지자면, 보통 실질형태소 쪽이 형식형태소보다 구체적인 의미 내용을 많이 갖고 있다. 이때 '실질적 의미'라는 것은 문법적 기능이 아니라 바깥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물이나 그 속성, 또는 언어 바깥의 세계에서 일어..

언어학 2023.12.11

언어 사용자는 종종 기꺼이 귀찮음을 참는다 - 코퍼스로 엿보는 동음이의어와 음운 이웃 회피(feat. '줄은')

1. 줄은? 준? 35쪽 최근에 교보문고에서 광고하던 일본의 미스테리 소설 을 사서 읽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괜찮다. 신경 쓸 일이 하나 줄은 건 좋은 것 아닌가. '줄은'에 주목해 보자. ​ 표준어 기준 ‘줄다’의 관형사형은 현재시제에서 ‘주는’, 과거시제에서 ‘준’이다. 규범에 따르면 어간 말음이 /ㄹ/인 용언들은 /ㄴ/, /ㅂ/, /ㅅ/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예외 없이 /ㄹ/이 탈락하는 활용을 하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 트위터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twitter.com/urimal365/status/222599850062127104 트위터에서 즐기는 국립국어원 “‘확연히 준 것’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줄다’처럼 ‘ㄹ’ 받침인 동사 어간에 관형사형 어미 ‘-ㄴ..

언어학 2023.07.09

동음이의어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 꿀잼 심리언어학 실험, accidental gap의 쓸모

1. 동음이의어의 비효율성 의혹 국어를 공부할 때든 외국어를 공부할 때든 언어에 동음이의어가 아주 많이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곱씹어 보면 이상한 일이다. 동음이의어는 언어 사용을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비효율적인 존재 아닌가? 한국어의 발음 규칙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음절이 모여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기저형 기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위와 같은 가상의 '음절 공간'을 의미의 저장 창고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가'라는 음절에는 'go'라는 의미를, '같'이라는 음절에는 'same'이라는 의미를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는 것이다. (컴퓨터의 작동 방식과 비슷하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음절 공간'이라는 의미 저장 창고를..

언어학 2023.03.15

[학교에서는 못 배우는 국어 문법] 예사소리와 거센소리의 음높이 차이 (Praat)

1분짜리 짧은 영상에 담았다 언어와 매체 등 중고등학교 과정의 국어 문법 수업에서는 잘 다루지 않겠지만, 현대 중앙어의 예사소리와 거센소리는 음높이가 다르다. 정확히는, 뒤따르는 모음에 서로 다른 음높이를 유발한다. 아내에게 음성학을 설명한 것 중에 연관된 내용을 잘라서 1분짜리 영상으로 올린다. 전에 어떤 베트남인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유튜브 영상에서 평음/격음의 구분법으로 음높이를 가르치는 것을 목격했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기식의 삼중대립이 유형론적으로 흔하지 않은 만큼 외국인에 대한 한국어 교육에서 이 방법이 적극 활용되면 좋을 것 같다. 이번 쇼츠는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지 못했나 보다 ㅋㅋ... 살짝 기대하며 업로드했으나 조회수가 4에서 멈췄다. https://youtube.com/shorts/oS..

언어학 2023.03.05

한국어 성조? 지금 이 순간의 언어변화 - Praat으로 음높이 조절하여 예사소리를 거센소리로 만들기

평음(예사소리)과 격음(거센소리)을 구분하는 척도를 보통 기식(숨의 양)이라고 설명하는데요, ​ 최근 젊은 세대의 수도권 말에서는 예사소리와 거센소리 사이에 기식의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마치 성조처럼 음높이의 차이로 거센소리와 예사소리를 구분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 거센소리는 높은 음, 예사소리는 낮은 음, 이렇게 말이죠. ​ 1935년에 어느 41살 아저씨하고 11살 남자아이의 말을 녹음한 자료가 있었는데요, ​ 그때도 이미 41살 아저씨의 말에는 예사소리와 거센소리 간 음높이 차이가 별로 없는 반면 11살 아이에게서는 음높이 차이가 조금 보였는데, ​ 이 음높이 현상에 주목한 연구진이 2005년에 81살이 된 동일인물의 녹음 자료를 분석해 보니,[1] 70년 전보다도 더 음높이 차이를 보..

언어학 2023.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