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문법을 배우다 보면 '내용어content word'와 '기능어function word'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다.
그 개념은 국어 문법 시간에 배우는 '실질형태소', '형식형태소'의 정의와 아주 흡사하다.
얼마나 비슷하냐면, 영어 위키백과 'Content word' 문서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어휘형태소'이고 'Function word' 문서의 한국어 번역본은 '문법형태소'일 정도다.
(다만 내용어와 기능어는 일단 단어word에 대한 분류이므로 접사 등에 대해서 적용할 수는 없다.)
한국어의 '사람', '배', '크-', '작-', '먹-', '자-' 등이 실질형태소이듯이 영어의 'person', 'pear(ㅋㅋ)', 'big', 'small', 'eat', 'sleep' 등은 내용어이고,
한국어의 '에서', '에게', '로', '와', '-고', '-었-' 등이 형식형태소이듯이 영어의 'in', 'to', 'with', 'and', 'did' 등은 기능어이다.
(오해 방지: '사람', ...등은 내용어이기도 하고, 'person' ... 등은 실질형태소이기도 하다. '에서', ... 등도 '기능어'라고 말하는 데에 문제가 없고, 'in', ... 등은 형식형태소이기도 하다. 위 서술은 각 문법학계에서 흔해 보이는 관행에 따른 것일 뿐이다.)
영어 위키백과에서 '내용어'와 '기능어'의 정의를 찾아 보면 대강 이렇게 되어 있다.
내용어: '의미적 내용을 가지고 문장 의미에 기여하는 단어. 명사, 동사, 형용사 등'
(Content words, in linguistics, are words that possess semantic content and contribute to the meaning of the sentence in which they occur.)
기능어: 어휘적 의미가 거의 없고 ... 단어끼리의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는 단어. 전치사, 대명사, 접속사, 관사 등
(In linguistics, function words (also called functors) are words that have little lexical meaning or have ambiguous meaning and express grammatical relationships among other words within a sentence, or specify the attitude or mood of the speaker. They signal the structural relationships that words have to one another and are the glue that holds sentences together.)
저번 글에서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를 '실질적 의미의 유무'로 구분했었는데, 그와 거의 같은 기준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를 찾아 보면 아래와 같은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 표시는 해당 표제어를 표준어 규범에 따라 표기할 때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나 붙여 써도 규범에 맞는다는 뜻이다.)
실질^형태소: 구체적인 대상이나 동작, 상태를 표시하는 형태소.
형식^형태소: (실질 형태소에 붙어) 주로 말과 말 사이의 관계를 표시하는 형태소.
하여간 이제껏 말한 것과 대동소이한 이야기다.
간단한 예문을 한번 보자.
(이 글이 논문은 아니지만, 언어학 논문의 예문에 이름을 넣을 때 sleepy_wug 님이 '언어학하고 있네' 티스토리 블로그에 소개하신 팁을 참고하면 좋다. 잘 읽어 보면 고려할 점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글이니 일단 한번 읽어 보시라.)
https://linguisting.tistory.com/97
Alex is going to buy an apple with Chris.
지아는 서아와 함께 사과를 사러 가ㄴ다.
영어에서는 내용어에 노란색, 기능어에 파란색을 씌웠고,
한국어에서는 실질형태소에 노란색, 형식형태소에 파란색을 씌웠다.
(영어 'going' 같은 경우 단어 자체로는 내용어이면서 형식형태소 '-ing'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대략 의미가 서로 비슷한 부분에 비슷한 색이 씌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영문법에서 배우는 '내용어/기능어'와 국어문법에서 배우는 '실질형태소/형식형태소'는 아주 비슷한 분류이다.
그런데 유독 한 부분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것은 '대명사'의 분류이다.
명사, 동사(의 어간), 형용사(의 어간)는 국어문법에서도 실질형태소로 분류되고 영문법에서도 내용어로 분류된다.
국어문법에서는 조사나 어미를 형식형태소로 분류하고, 영문법에서는 그와 기능이 유사한 관사, 전치사, 조동사, 접속사 등을 기능어로 분류한다.
(부사는 좀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 국어(학교)문법에서는 일괄적으로 실질형태소로 분류한다.)
그런데 유독 '대명사'에서는 두 문법학계의 분류가 많이 달라진다.
국어문법에서는 대명사를 실질형태소로 분류하는 반면,
영문법에서는 대명사가 기능어의 대표적인 예로 등장한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개별 언어의 문법 범주는 오로지 그 언어의 고유한 문법 범주일 뿐, 다른 언어의 문법 범주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Haspelmath(2007)의 Preestablished categories don't exist: Consequences for language description and typology를 읽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Bybee(1985)의 앞부분에도 비슷한 언급이 등장한다.
내가 위 그림과 이 글에서 '조사'와 '전치사'를, 그리고 '어미', '조동사', '접속사'를 하나로 묶은 것은 대략의 (원형적?) 기능 겹침에 기반한 편의적인 것이고, 어떤 실체적 동일성이나 분류상의 절대성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다.
국어와 영어의 대명사를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 글과 위 그림에서 ‘대명사가 실질형태소/기능어’라고 말하는 건 모든 언어에 공통적으로 있는 보편 범주로서의 대명사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국어문법학계와 영어문법학계가 국어와 영어의 대명사를 각각 그렇게 분류하더라 하는 말일 뿐이다.
국어문법과 영문법이 대명사를 서로 달리 대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 보인다.
우선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국어(학교)문법에서는 교육의 편의상 음운적으로 자립적인 단일어를 모조리 실질형태소로 분류하는 것 같다. 국어의 대명사 또한 음운적으로 자립적이므로 그냥 실질형태소로 분류한 것이다.
다음으로 국어 대명사와 영어 대명사의 속성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짚을 수 있다.
문법화에 대한 연구를 보면, 어떤 언어 요소의 문법화가 진행될수록 해당 요소는 특정 의미를 나타낼 때 필수적이며 유일한 요소로 바뀌어 간다.
이러한 관점을 생각하면 필수성과 유일성의 측면에서 영어의 'I'가 한국어의 '나'나 '저'보다 더 문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자칫 가치판단을 담은 말로 보일까 봐 좀 우려스러운데,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은 그냥 '어휘적lexical'의 반대말일 뿐이지 무슨 우월성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형식형태소스러움'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2, 3인칭으로 가면 차이는 더 심해진다. 영어의 'you'나 '(s)he' 등에 비하면 한국어의 2, 3인칭 '대명사'는 필수적이지도 않고 유일하지도 않다. (2인칭은 몰라도 한국어에 3인칭 대명사가 과연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하는 논의를 종종 접한 듯한 기억이 있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한다면 한국어의 대명사는 좀더 실질형태소/내용어 쪽에 가깝고 영어의 대명사는 좀더 형식형태소/기능어 쪽에 가깝다고 말하더라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점이 있는데, '실질형태소/형식형태소'는 국어에 대해서만 거론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며 '내용어/기능어' 또한 영어에 대해서만 거론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영어에 대해서도 '실질형태소/형식형태소'를 논하는 것이 가능하고 유익하며, 반대로 국어에 대해서도 '내용어/기능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국어/영어 문법 교육의 순서나 관행상 더 자주/먼저 접하게 되는 용어를 각 언어와 연결지었을 뿐이다.
요컨대 이 글에서 '한국어의 ...는 실질/형식형태소로 분류된다'라고 하는 말은 언어(문법)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 문법 기술에 대한 기술인 셈이다.
++ 다음 글에서는 의미 내용의 실질성이라는 것이 있거나 없거나처럼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양적으로 많고 적음을 따질 수 있는 연속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논할 것이다.
여기서 대략의 골자만 밝혀 둔다.
- 'X'에 'a'가 붙어서 만들어진 결합체 'Xa'의 의미가 'X' 혼자만의 의미로부터 멀면 멀수록 'a'의 의미 내용은 많다고 말할 수 있다.
- '먹다'에 형식형태소 '-는-(현재시제 어미)'과 '-이-(사동 접미사)'를 붙여 보면 각각 '먹는다'와 '먹이다'가 나온다.
- '먹다' = X, '-는-' = a1, '-이-' = a2
- '먹는다' = Xa1, '먹이다' = Xa2
- Xa1과 Xa2의 의미 중 어느 쪽이 '먹다'(X)의 의미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하다.
- Xa1('먹는다')는 X('먹다')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시간축 상에서의 위치만을 결정한 것이지만,
- Xa2('먹이다')는 아예 X('먹다')하고는 전혀 다른 사태를 나타내는 말이 된다.
- 따라서 a1('-는-')의 의미 내용량은 a2('-이-')에 비해 더 적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는-'과 '-이-'는 둘 다 형식형태소인데, 그 안에서도 의미 내용의 양에 서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 이상의 논의는 Bybee(1985)를 참고한 것이다.
+++ 그 다음으로는 '고립어(분석어)', '굴절어', '교착어'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 언어학 논문 예문에 넣을 이름을 고르는 데 대한 sleepy_wug 님의 글
+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에 관한 '저번 글'
https://cha5ylkhan.tistory.com/47
+ 실질형태소 및 내용어는 보통 열린 부류고(한국어 용언은 닫힌 부류에 가까워서 특이하지만 ‘-하-’ 같은 파생이 매우 활발함)
형식형태소 및 기능어는 보통 닫힌 부류라는 점도 알아 두면 좋다.
열린 부류라 함은 새로운 요소가 활발히 생긴다는 말이고(원래 있던 요소가 없어지는 것도 그만큼 활발)
닫힌 부류라 함은 반대로 새로운 요소가 생기는 일도 있던 요소가 없어지는 일도 드물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명사가 생겨나는 일은 늘상 보게 되지만, 새로운 조사나 새로운 전치사가 생겨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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