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 언어와 매체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실질형태소(어휘 형태소 lexical morpheme)와 형식형태소(문법 형태소 grammatical morpheme)를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영문법에서 배우는 '내용어content word'와 '기능어function word'도 비슷한데,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
‘실질형태소’는 실질적 의미가 있는 형태소이고,
‘형식형태소’는 실질적 의미가 거의 없고 형식적 의미만 있는 형태소이다.
구체적 의미 내용의 양을 따지자면, 보통 실질형태소 쪽이 형식형태소보다 구체적인 의미 내용을 많이 갖고 있다.
이때 '실질적 의미'라는 것은 문법적 기능이 아니라 바깥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물이나 그 속성, 또는 언어 바깥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가리키는 의미라는 뜻이다. ‘사람’, ‘배’, ‘예쁘-’, ‘크-’, ‘먹-’, ‘자-’ 등이 모두 언어(문법) 바깥의 무언가를 가리키는 구체적 의미를 가진 실질형태소이다. (언어의 일부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단어, '접사'라는 단어, '어미'라는 단어, '격'이라는 단어 등도 실질형태소(의 결합체)이다. 이들의 기능은 해당 개념에 대한 지시이고, 그 자체로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형식적 의미'라는 것은 주로 말을 엮어내는 데에 필요한 틀, 즉 문법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기능이다. 조사 ‘이/가’, ‘을/를’, 어미 ‘-아/어’, ‘-었-’ 등이 모두 문법 때문에 사용되는, 형식적 의미를 가진 형식형태소이다.
모든 형식적 의미가 언어 바깥의 세계와 연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문법의 '시제'는 문법 바깥의 '시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문법의 '격'은 문법 바깥의 의미 역할(semantic role)과 많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그런데도 시제나 격을 나타내는 형태소의 의미를 형식적 의미라고 분류하는 것은, 우리가 그 형태소를 사용하는 주된 목적이 (다른 게 아니라) 언어로써 정보를 포장하고 전달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실질형태소는 의미가 있는 형태소, 형식형태소는 의미가 없는 형태소”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더러 보이는데, 수험적으로 유용한 접근일지는 모르나 형태소는 정의상(by definition)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그다지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었-’, ‘-는-’, ‘-이-’, ‘-히-’ 등의 형태소에 들어 있는 ‘과거, 현재, 피동, 사동’과 같은 문법적 의미도 의미는 의미이다.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그런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국어 문법 공부를 하다 보면 좀 당황스러운 경우를 마주하게 된다.
국어 시험에서는 조사, 접사, 어미만을 형식형태소로 분류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실질형태소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면 이 분류를 잘 외워 두라.)
이러한 분류에 따라 공부하다 보면,
실질적 의미가 느껴지는데도 형식형태소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고,
실질적 의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데도 실질형태소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ㄱ. 맏이, 사기꾼, 풋사과, 맨발, ...
ㄴ. 그 사람은 이미 포기해 버린 것 같다.
문법을 공부하고 있다.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
ㄱ은 소위 ‘의미를 더하는 접사’의 예이다. ... 의미를 더한다고?
학교문법에서 모든 접사는 형식형태소로 분류되므로, 위에서 언급한 형식형태소의 정의에 따르면 이 접사들에는 실질적 의미가 거의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접사가 의미를 더한다고?
'학교문법에서 모든 접사는 형식형태소'라는 말은, 이 글을 읽는 중고등학생이나 수험생들이 시험에서 저 형태소들을 마주친다면 복잡한 생각 말고 그냥 형식형태소로 간주하면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ㄱ에 나온 접사 각각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 접사 자체로 실질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거나,
그 접사의 의미를 말하려면 반드시 실질적인 개념을 참조해서 기술해야 하는 접사이다.
'맏형' 등에서 '맏-X'의 의미는 '가장 나이가 많은 X'과 거의 비슷하다.
'맏-'의 의미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가장', '나이', '많-' 모두 실질형태소이다.
위에서 형식형태소에는 실질적 의미가 거의 없다고 하였는데,
형식형태소의 의미를 말했더니 그 안에 실질 의미(를 나타내는 실질형태소)가 마구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X-꾼'의 의미는 대략 'X-하는 사람'과 같으며(세부 의항마다 '습관적으로', '즐겨', '전문적으로'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이 안에도 '사람'이라는 실질 의미가 들어 있다.
ㄱ의 접사들은 다른 자립 단어에 비하면 의미의 추상성이 강하긴 하지만, (다의성이 강함)
그 정도의 추상성, 다의성은 접사가 아닌 자립 단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것’의 용법 중 적어도 몇 개는 극히 추상적이다. 누가 뭐래도 형식형태소인 명사형 전성어미의 의미와 구분할 수 없는 용법도 있다.
'보다'를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해서 의항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 보면 ‘보다’의 다의성이 ‘맨-’이나 ‘-꾼’의 다의성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가 순전히 의미에 기반한 분류라면, '것' 등은 실질형태소이고 '맏-' 등은 형식형태소라는 결론은 아주 이상하다.
(둘 다가 실질형태소다, 또는 둘 다가 형식형태소다 하는 이분법적 결론을 내자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의미의 실질성~형식성이라는 것이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것임을 말하는 시리즈의 시작이다.)
한편 ㄴ은 반대로, 학교문법에서 실질형태소로 분류하지만 실질적인 의미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예들이다.
ㄴ. 그 사람은 이미 포기해 버린 것 같다.
문법을 공부하고 있다.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
학교문법에서 접사나 조사나 어미가 아닌 단어(조사 제외)는 모두 실질형태소로 분류된다.
따라서 위에 등장하는 '그', '버리-', '것', '있-', '수' 모두 학교문법에서는 실질형태소이다.
그러나 실상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ㄴ의 형태소들은 의미의 실질성이 매우 떨어지고, 언어 바깥의 세계가 아니라 언어를 조직하는 문법과 훨씬 깊이 연관되어 있다.
관형사 '그'는 언어적 기능과 무관하게 세계에 존재하는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여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더 가까운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거나,
언어로 된 대화 안에 언급되었던 것을 나타내는 등 언어를 조직하여 의사를 표현하는 데에 훨씬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포기해 버렸다'의 '버리다'는 어떨까?
'쓰레기를 버리다'의 '버리다'와 비교해 보면 의미의 실질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쉽다.
'쓰레기를 버리다'는 분명 언어 바깥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태를 나타내는 것인 반면,
'포기해 버렸다'에서는 '포기'라는 상황을 언어로 묘사하는 사람(화자)이 그 상황에 대해 아쉬운 감정을 느낀다는 의미가 느껴진다.
또 'X-아/어 버리다'는 그 자체로 어떤 구체적인 구조를 가진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X라는 사건이 완료되었음을 나타내는 틀(schema)과 같은 형식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건의 진행을 나타내는 'X-고 있다' 또한 마찬가지이다.
'것'은 또 어떤가?
학교문법에서 모든 의존명사는 자립형태소이고(‘음운적으로는 자립적이다’라는 주장),
이제껏 말했듯이 학교문법에서 모든 자립형태소는 실질형태소이므로,
학교문법에서 의존명사는 모두 실질형태소이고 ‘것’도 실질형태소이다.
'것'이 학교문법의 가르침에 따라 실질형태소라면 언어 바깥의 구체적인 대상물을 가리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과연 '포기해 버린 것 같다'에서 ‘것’이 나타내는 구체적인 대상물은 무엇인가?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것'의 의미 또한 실질적이기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가깝다.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포기해 버린 것 같다'에서의 '것'은 마치 명사형 전성어미 '-ㅁ'만큼 형식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듯싶다.
혼란스러운 이야기만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학교문법에서 실질형태소로 분류되는 형태소 중에도 그 의미가 매우 형식적인 형태소가 많고,
반대로 학교문법에서 형식형태소로 분류되는 형태소 중에도 그 의미가 꽤 실질적인 형태소가 많다는 것이다.
학교문법에서 [모든 조사, 어미, 접사를], 그리고 [조사, 어미, 접사만을] 형식형태소로 분류하는 것은 제대로 의미에만 기반하여 만들어진 분류가 아니라, (아마도 교육상의 편의를 위하여) 음운적 의존성이라는 의미 바깥의 기준을 함께 가져다 적용한 결과로 보인다.
둘 중 하나로 답을 내야 하는 시험에서 형태소를 마주할 때마다 그 의미가 실질적인지 형식적인지 따지는 것은 강의자나 출제자에게도 수험생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내용어'와 '기능어'가 '실질형태소' 및 '형식형태소'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다루고,
그 다음 글에서는 이제까지의 논의에 기반하여 의미의 '실질/형식성'이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것임을 이야기할 것이다.
오류에 대한 지적과 질문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 영어를 전공하신 분께서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영어 문법 및 영어 형태론 수업에서도 lexical morpheme의 목록에 affix를 넣는 일이 잘 없다고 한다.
어떤 형태소가 free(자립)이냐 bound(의존)이냐 하는 것은 그 형태소가 의미적으로 lexical(어휘적; 실질적)이냐 grammatical(문법적 또는 functional기능적)이냐 하는 것과 독립적이다. (일부 상관관계가 있을 뿐)
이를테면 실질형태소는 자립적인 것이 많지만 국어의 용언 어간은 모두 의존적이고, 영어에도 Morph-, phon-, -logy 등과 같은 Latinate bound root다 있다. (후자는 국어의 한자 어근 일부와 견줄 만해 보인다.)
또 나중에 비슷한 예를 다시 다루겠지만,
unhappy의 un-과 happiness의 -ness는 둘 다 affix인데 un-에는 꽤나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반면 -ness에는 거의 문법적인 의미만 있을 따름이다. Affix끼리도 의미 실질성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실질형태소 및 내용어는 보통 열린 부류고(한국어 용언은 닫힌 부류에 가까워서 특이하지만 ‘-하-’ 같은 파생이 매우 활발함)
형식형태소 및 기능어는 보통 닫힌 부류라는 점도 알아 두면 좋다.
열린 부류라 함은 새로운 요소가 활발히 생긴다는 말이고(원래 있던 요소가 없어지는 것도 그만큼 활발)
닫힌 부류라 함은 반대로 새로운 요소가 생기는 일도 있던 요소가 없어지는 일도 드물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명사가 생겨나는 일은 늘상 보게 되지만, 새로운 조사나 새로운 전치사가 생겨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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