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과 언어학

[언어학과 과학철학] 관측의 이론적재성, 신호와 잡음

cha5ylkhan 2023. 2. 12. 16:49

 

 
언어학도들은 Praat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음향음성학(acoustic phonetics)을 배우면서 스펙트로그램이나 파형으로부터 어떤 분절음이나 음성 자질을 나타내는 단서, 즉 신호(signal)를 찾아내는 법을 공부하고는 한다. ('포먼트formant'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런데 막상 실제 음성 데이터를 가지고 스펙트로그램 읽기를 시도해 보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관찰하는 음성 데이터에 우리가 관찰하고자 하는 언어음 말고도 다양한 잡음(noise)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잡음은 단순히 우리가 찾는 신호를 숨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변형을 가할 때도 있어서 스펙트로그램 해석을 더욱 어렵게 하고는 한다.

 

이러한 개념 용어는 통계/데이터 분석과 같은 분야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고, 나아가 과학 및 과학철학 제분야에서도 널리 사용된다.

 

예를 들어 갈릴레이 역학에서 공기 저항이나 마찰 같은 것은 자연의 원리에 있어서 본질적이지 않은 잡음이었고, 물체의 질량이나 위치, 진자의 폭이나 길이 등은 자연의 원리를 반영하는 중요한 신호였다. (그래서 갈릴레이는 공기 저항이나 마찰 같은 잡음을 제거한 이상적 상황에서의 사고실험을 많이 진행했다.)

 

신호와 잡음을 구분하는 것은 현상의 객관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보다 단순한 원리로 환원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자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이다.

 

그런데 과학철학 및 과학사의 관찰에 따르면,

이런 잡음과 신호의 구분이 애초부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관찰하는 자가 가지고 있는 이론 틀에 의하여 정의되는 의존적인 것일 때가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애초에 무엇이 잡음이고 무엇이 신호인지를 이론이 결정짓는다.

 


 

전에 블로그에 소개했던 캠릿브지대 장하석 교수의 EBS 과학철학 교양강의 제4강에 따르면,

16세기 이전까지 유럽의 천문 기록에서는 '신성(nova)'이나 '초신성(supernova)'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반면 중국의 천문 기록에서는 무려 서기 185년부터 신성, 초신성이 활발하게 나타난다. 혜성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유럽의 하늘은 조용하고 중국의 하늘은 변화무쌍했던 걸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 과학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면 분명 당대 유럽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이 본 하늘은 서로 (거의) 같았을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감지한 시각 정보도 서로 거의 같았을 텐데,

이렇게 양쪽의 기록에 차이가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당대 유럽인들과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천문학 이론의 틀, 즉 패러다임(paradigm)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16세기 이전 유럽인들의 천문학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스템을 따르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에서 천계는 지상계와 달리 완벽한 영역이기 때문에 뭐가 새로 생기거나 사라지는 등의 변화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의 눈에 신성이나 초신성이 관찰될 때 그러한 현상은 천문 현상이 아니라 기상 현상, 즉 달보다 밑에 있는 지구의 대기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처리되었고 천문 기록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시 유럽 천문학자들은 신성, 초신성을 마치 구름이나 비처럼 '진짜'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는 데에 방해만 되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런 현상을 마땅히 무시해야만 비로소 천문 현상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 동시대 중국의 천문학 관념에서 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나거나 별이 사라지는 변화는 인간의 삶에 대해 흉조나 길조가 되는 중요한 징조였기 때문에 천문 기록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내용은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139쪽 및 유튜브 강의 영상에서 참조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다른 말로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신성, 초신성 등의 현상은 유럽인들의 천문학에서는 잡음(noise)이었으나, 중국인들의 천문학에서는 자연이 보내는 중요한 신호(signal)다.

 

장하석 교수의 말에 따르면, 패러다임이 바뀌면 현상 관측 자체도 바뀐다.

또는 반대로, 현상을 어떤 방식으로 관측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이론에 대한 가정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측 자체에 이미 이론이 실려 있다는 것을 관측의 이론적재성이라고 말한다.)


언어학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로 언어학에는 워낙 다양한 이론 프레임워크가 있으니 이처럼 현상 자체를 다르게 정의하는 사례 또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지식이 부족하여 많은 걸 나열할 수는 없지만, 당장 떠오르는 사례는 이런 것이 있다.

 

  • 사전-문법의 이분법적 모형 vs 구문문법과 같이 어휘-문법 연속체를 가정하는 모형
    • the X-er, the Y-er과 같은 특이 구문 전자 이론에서는 언어능력의 핵심과 관련 없는 잡음으로 간주되겠으나, 후자 이론에서는 언어학 이론에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신호가 된다.
    • (다만 Haspelmath는 애초에 전자와 같은 완전한 이분법 이론은 세상에 없으므로 구문문법 연구자들이 전자를 공격하는 것은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보는 듯하다.)

 

  • 언어능력(좁게는 통사론)과 영역일반적(domain-general) 인지능력이 독립적이라고 보는 이론 vs 그러지 않는 이론
    • 아마도 '있이'와 같은 유추 현상 전자에서는 잡음, 후자에서는 신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언어능력(competence) 또는 지식과 수행(performance)을 날카롭게 구분짓는 이론 vs 상대적으로 그러지 않는 이론
    • 전자와 같은 이론에서 수행상의 오류로 처리되는 현상들은 중요한 신호가 못 되는 잡음에 불과하지만,
    • 후자와 같은 이론에서는 그러한 현상도 중요한 신호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통찰이 자칫 상대주의로 흐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기보다

실제 과학의 역사에서는 잡음을 무시해야만 진보를 이룰 수 있었던 때가 많으므로

Croft가 RCG에서 methodological opportunism을 공격하면서 주장했던 '모든 반례를 평등하게 대하자'와 같은 급진적인 주장이 다소 공허한 것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르침과 지적과 교정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