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어의 형태소 중에는 음소(‘수어소’) 여러 개가 앞뒤 순서를 따질 수 없이 동시에 표현(‘발음’)되는 것들이 아주 많다.
그리고 두 개 이상의 형태소가 결합할 때 형태소 하나의 음소 일부가, 그 형태소와 결합하는 다른 형태소의 음소로 대체되어 버리는 경우, 게다가 그 두 개 이상의 형태소에 속하는 모든 음소가 동시에 표현되는 경우도 아주 많다.
이러한 수어의 특징(‘동시성’)은 음성언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만 들어서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그림으로 곧장 표현하면 편할 텐데 아쉽게도 당장은 여의치가 않아서 글로 대체한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시도해 보겠다.)
아래는 한국수어의 표현들을 간략히 기술한 것이다. (수위, 수향이나 수동의 정확한 양상 등 동시표현과 음소 대체라는 주제와 무관한 디테일은 생략하였다.)
‘(1)년’ (a year)
수형1 /1/
수형2 /S/
수동 /우세손이 비우세손 주위를 앞뒤로 빙 돈다/
- 이상이 모두 동시에 표현된다.
‘5’
수형 /A/
‘5년’
수형1 /A/
수형2 /S/
수동 /우세손이 비우세손 주위를 앞뒤로 빙 돈다/
- 이상이 모두 동시에 표현된다.
(‘(1)년’으로부터 수형1만 ‘5’의 수형으로 대체됨)
‘5년 뒤’
수형1 /A/
수형2 /S/
수동 /우세손이 비우세손으로부터 출발해 앞으로 이동한다/
- 이상이 모두 동시에 표현된다.
(‘5년’으로부터 수동만 대체됨. ‘앞’이라는 방향이 미래를 나타냄.)
어느 음소(수어소)가 어느 형태소의 일부이며 어느 의미를 나타내는지 잘 생각해 보면, 수어의 형태론이 음성언어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 잘 느껴질 것이다.
전에 수어의 표현력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동시성’ 덕분에 수어는 단위시간당 표현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음성언어에 비해 훨씬 더 많다.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 참조.
https://labphon.org/sites/default/files/labphon19/Papers/LabPhon19_paper_29.pdf
(티스토리에서 활동하시는 음운론 전공 언어학자이신 sleepy_wug 님께서 댓글로 알려주신 음운론 국제학회의 발표자료이다.)
(전에 내가 궁금해했던 문제,
즉
‘음소 인벤토리가 작은 언어는 음소 인벤토리가 큰 언어보다 단어 및 형태소의 평균 길이가 길까?
또는
음절구조가 단순한 언어는 음절구조가 복잡한 언어보다 단어 및 형태소당 평균 음절 개수가 더 많을까? (인도네시아어를 보고서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었다. 답은 ‘그렇다’라고 한다.)
2. 하스펠마트는 umlaut, ablaut같은 어근 변화 등의 ‘형태론적 과정’을 포괄하는 ‘형태소’ 개념을 버리고, 연속적인 음운으로 이뤄진, zero가 아닌 ‘형태’ 즉 morph를 언어학의 기본적인 최소 형식 단위로 삼자고 제안해 왔다.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41191538_The_morph_as_a_minimal_linguistic_form
그런 하스펠마트가 이번에는 ‘root’라는 개념의 정의 또한 비슷한 방향으로 고치자는 논문을 썼고 이를 자기 페이스북에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여러 언어학도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잘 쓰던 용어를 하스펠마트는 괜히 이상하게 재정의하려는 집착을 보인다는 비판이 많았다.)
왜냐면 하스펠마트는 ‘k-t-b’와 같은 아랍어 등의 'root'도 root라고 부르지 말자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스펠마트 본인에 따르면 root라는 개념어가 어근이란 의미로 쓰인 것은 바로 이런 ‘어근’을 가리키면서부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root가 하스펠마트에게 있어서 root가 못 되는 이유는, ‘k-t-b’ 등이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은 연속적인 형태morph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root’의 정의에 대해 나는 개인적으로 엄밀할지언정 무용하다는 감상인데, 학계 바깥에 있는 내가 무슨 의견을 강하게 낼 수 있는 입장은 애초에 못 되기는 한다. 무용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k-t-b와 ‘쓰-’가 서로 다르지만 분명 비슷한 점이 많은데 root를 후자로만 한정지어서는 그 비슷한 점을 포착 못 하는 것 같아서이다.)
3. 하스펠마트 페이스북의 댓글창에서 벌어진 일련의 ‘키배’ 공방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이 글의 1.에 설명한 것과 같은 수어의 형태(통사)론 문제가 떠올랐다.
위에 설명한 수어의 형태(통사)론은 아랍어의 형태론과는 분명 다르지만, 여러 형태소가 시간 순서에 따라 선형적으로(linearly) 표현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때로는 형태소 간 접면의 음소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기 때문에 하스펠마트가 morph의 자격으로 요구하는 것만큼 연쇄적(concatenative)인가 하는 문제도 다소 의문스럽다. 말하자면 음성언어의 ‘모텔’ 같은 데서 보이는 blending과 유사한 점이 있달까?
그러면 하스펠마트는 수어의 ‘형태소’나 ‘어근’을 과연 자신이 정의한 morph나 root의 범위 안에 넣어 줄까, 아니면 빼 버릴까?
그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하스펠마트의 morph 논문과 root 논문을 열어서 sign language가 언급된 부분이 있는지 검색을 해 보았으나 아쉽게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댓글을 남겨 보기로 했다!
Just to clarify, does a root (and its combination with other morphs) have to be "linear" in your definition?
(I ask because the word 'linear' is mentioned in a comment above)
Most 'morphemes' of sign languages are structured non-linearly (but perhaps concatenatively) and combine non-linearly (but perhaps concatenatively) in that the 'phonemes' that form the 'morphemes' are realized at the very same time so that no phoneme can be said to precede or follow another within that morpheme. Plus, when morphemes combine, many phonemes of one morpheme are replaced with those of the other morpheme, so that it is so common in sign languages that more than 2 morphemes are 'pronounced' at the same time (so that no morphemes can be said to precede or follow the others in that sequence of morphemes)
Do these qualify as morphs (and roots) in your definition?
To show how sign language morphology is different from that of, say, Arabic, below are some expressions in KSL (details that are probably irrelevant are ignored)
'A year':
Handshape1 [1] + handshape2 [S]
Movement [hand1 moves in a circle around hand2]
- All above realized at the same time
'5': Handshape[A]
'5 years':
Handshape1 [A]
Handshape2 [S]
Movement [hand1 moves in a circle around hand2]
- All above realized at the same time
(From 'a year,' only handshape1 is altered to that of '5')
'In 5 years':
Handshape1 [A]
Handshape2 [S]
Movement [move hand1 forward]
- All above realized at the same time
(From '5 years,' only movement is altered to express the meaning of 'future')
영어로 이렇게 긴 글을 쓰기는 오랜만인데 잘 됐는지 모르겠다. 일단 왠지 기분은 좋다.
과연 하 옹은 답글을 남겨 줄 것인가?
일단 한 시간쯤 전에 좋아요만 조용히 눌렀다.
논문으로만 접하던 하스펠마트에게 좋아요를 받다니 왠지 느낌이 묘하다.
+ 생성문법에서처럼 생득적이고 보편적인 문법 범주를 상정하는 데에 하옹은 반대했고 개별언어는 저마다의 고유한 문법 범주와 따라서 저마다의 고유한 문법의 모습 그리고 기술을 갖는다는 게 하옹의 의견이라 생각했는데,
(언어간 비교를 하기 위함이라는 것 같지만) 모든 언어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용어를 일관적으로 정의하는 데에 이렇게 힘쓰는 모습이 약간 의외롭기도 하다.
언어학 방의 참괴 님 말씀으로는 하스펠마트가 가진 생각이
“언어에 따라 저마다의 문법 범주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언어간에 비슷한 애들이 있고 현재 쓰이는 용어들이 90% 이상의 '안 이상한' 언어에서는 유용하게 쓰이고 있으므로 쓰이고 있는 용어는 정의해야 한다” 이런 입장인 것 같다고 한다.
수어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의견을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나는 과연 답장을 받을 것인가!
답장이 오면 다시 공유해 보겠다.
+ 하스펠마트는 종종 본인을 촘스키의 대척점쯤으로 이미지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촘 옹처럼 나같은 민간인의 질문에 열심히 답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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