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__WXEmLoig8?feature=shared&t=213
"모든 수화언어의 공통조상은 없다."
vs.
"수어 문자로 쓰인 언어학 개론서를 본 적은 없다."
두 문장은 모두 'NP-은 없다'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구조에 관해 내가 느끼는 감각은 사뭇 다르다.
첫 문장의 주어 '모든 수화언어의 공통조상'은 분명히 하나의 명사구처럼 느껴지는 반면,
'수어 문자로 쓰인 언어학 개론서를 본 적'을 두고 하나의 명사구라고 말하기는 좀 개운치 못한 느낌이 있다.
왜 그게 개운치 못한지 내가 여기서 완벽히 설명할 자신은 없으나 아마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감각을 공유할 것이다.
그런 감각에 대해 일단 아래와 같은 점을 짚을 수 있다.
"수어 문자로 쓰인 언어학 개론서를 본 적은 없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의존명사 '적'에 대해서 논하려면,
[-ㄴ 적 없-]이라는 구문 단위의 정보를 동원하지 않고서는 어떤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이다.
'수어 문자로 쓰인 언어학 개론서를 본 적'이라는 '명사구'를 접한 한국어 사용자는 반드시 그 뒤에 '있(다)' 또는 '없(다)'가 나올 거라고 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적'이라는 의존명사는 [-ㄴ 적 없-]이라는 구문 단위의 구조에 어느 정도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다.
반면 '모든 수화언어의 공통조상'이라는 명사구에는 그러한 성질이 없다. '모든 수화언어의 공통조상'이라는 말까지를 들은 한국어 사용자가 그 뒤에 '있다'나 '없다'가 나오리라고 확신 있게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이 명사구는 '모든 수화언어의 공통조상은 없다'라는 구문의 구조에 그리 강하게 종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의존명사 '적'이 핵어를 맡는 명사구 '수어 문자로 쓰인 언어학 개론서를 본 적'에 대해 명사구 지위를 100% 인정하기가 껄끄러운 이유는 대충 이러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ㄹ 수 있-] 구문'에 대해 그러한 관점으로 글을 써 올린 적이 있다.
https://blog.naver.com/ks1127zzang/222881268307
그런데 이러한 내 느낌에 반하는 흥미로운 발화 사례가 몇 개 있어서 공유하고자 한다.
https://youtu.be/__WXEmLoig8?feature=shared&t=213
유재석: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 두 개를 다 가질 순... (스읍) 어."
하하: "맞아요, (그)건."
유재석: "(그)건 없겠더라고."
하하: "예."
중간에 끼어든 하하의 발화를 무시하고 유재석의 발화만 이어서 보면, 대충
"이 두 개를 다 가질 순, 그건 없겠더라고."
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위 문장에서 대명사 '그거'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 '이 두 개를 다 가질 수'라는 의존명사-구이다.
통사론에서 성분성(constituency)을 확인하는 테스트의 하나로 대치(substitution)를 배운다. '이 두 개를 다 가질 수'가 '그거'라는 대명사로 대치된다는 사실은, '이 두 개를 다 가질 수'를 하나의 성분으로 간주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의존명사구가 진정한 명사구가 아니라면 이러한 대치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하하가 끼어들어 리액션하는 과정에서 '그건'이 등장해서 유재석이 무의식 중에 그 말을 따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저 방송이 2012년 방송인데, 이렇게 오래된 방송에 '... 다 가질 순... 그건 없겠더라고.'라는 발화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내가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그만큼 특이하고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이라는 방증이 되는데, 이만큼 드문 현상을 가지고 의존명사구의 속성에 대한 일반적 진술을 끌어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든다. (밑에 하나가 더 있기는 하다.)
(한편 '...다 가질 순, 그건 없겠더라고'처럼, 일종의 주제성이 있는 명사구를 앞으로 빼 놓고 그 명사구를 뒤에서 다시 대명사로 가리키는 이러한 구문을 좌측 전위(left dislocation)라고 한댔던 것 같다.)
다음 사례도 살펴보자.
https://youtu.be/0ls796VCnfo?feature=shared&t=1522
(25분경부터 보라. 이 영상은 외도와 이혼에 관한 대화를 담고 있다.)
A: 가지고 있죠.
B: 보여주신 적 있으세요?
A: 아니요, 그건 없어요.
B: 보여주세요.
B의 질문에 대한 A의 대답에서 '그거'가 가리키는 것은 '보여주신 적'이라는 명사구이다.
굳이 저 대화에 얽힌 자세한 사정을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지만, 대략 A는 X를 가지고 있으며 C에게 X를 보여준 적은 없는데 B가 그 여부를 묻자 자신이 가진 X를 C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고 A는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 설명이 더 혼란스럽지만...
하여튼 B의 대답에서 '그거'가 가리키는 것은 X라든가 무슨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보여주신 적'이라는 명사구라는 게 나한테는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 또한 위에서 다룬 유재석 발화와 마찬가지로 아주 특이한 현상이고, 의존명사가 핵어를 이루는 명사구의 실체성을 일부 보여주는 듯한 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보여주신 적'이라는 constituent 후보를 '그것'이라는 대명사로 substitute하는 데에 성공한 사례)
위에 링크 첨부한 '-ㄹ 수 있-'의 구문성에 관한 글에는 '... 만들 수 있어야 하지'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에 대해 나는 나의 말실수를 이유로 대략 '... 만드-[ㄹ 수 있]-어야 하지'와 같은 구조를 제시했으나,
만약 학교문법이라든가 생성 통사론에서라면 대략 아래 그림과 같은 구조를 제시할 것이다.
원래 ㄹ 수 있 글에 넣으려던 그림
이 글에서 제시한 두 개의 영상 사례는 대충 위 무지개 그림과 같은 구조를 지지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상의 영상에 등장하는 문형들이 여전히 내게는 다소 특이하게 느껴지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라면 평소 저런 말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나의 언어습관에 대해 이렇게 애매하게 말하는 이유는,
원어민이라 해도 코퍼스를 들여다 보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어 화자들의 평소 발화 습관을 단언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촘스키 본인마저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전에 어느 코퍼스언어학 교재에서 보고서 언어학 방에 공유한 대화 내용이다:
Chomsky: 'perform'은 mass-word object를 취할 수 없다. 'perform a task'는 되는데 *perform labor는 안 되지 않나?
Hatcher: 코퍼스를 보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는가?
Chomsky: 어떻게 아냐고? 내가 영어 원어민이니까.
(대화가 좀 진행되다가)
Hatcher: 'perform magic'은?
Chomsky: ... 그건 괜찮네.
(Chomsky는 그러나 '근데 그건 큰 그림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예외에 불과할 거야.' 라는 식으로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McEnery and Brezina. (2022).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Corpus Linguistics. 51-52.
(이 내용은 언제 한 번 별도의 글로 올리는 게 낫겠다.)
+ 브런치스토리의 @콜랑 님께서 이 글처럼 흥미로운 발화 영상 사례에 관한 글을 종종 올리신다. 관심 있는 사람은 구독해 보면 좋겠다.
(본문의 영상 두 개에서 등장하는 '그건'이 회로 꼬임이나 발화실수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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