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

'선 넘네', 'push the line' - 개념적 은유

cha5ylkhan 2022. 9. 16. 08:05

어떤 행동이 수용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선을 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수용 불가능한 수준이면 '선을 넘었다'라고 하고,
수용 불가능한 수준의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할 때는 '선을 넘지 마라'라고 한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쓰이고,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쓰이는 표현이다. ('레드라인')

레퍼런스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개념적 은유가 드러나는 표현인 것 같다.
(아마 누군가가 이미 포착했을 테니까 좀더 열심히 찾아 보면 레퍼런스가 나올 것 같다.)

내 생각대로 이 개념적 은유의 구조를 대략 그려 보자면 아래와 같다.


근원 영역(Source Domain) 또는 근원 틀(Source Frame)은
거류/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계선과, 그 안에서 거류/이동하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목표 영역(Target Domain) 또는 목표 틀(Target Frame)은
사회적으로/개인적으로 수용 가능한 행동 양식의 종류에 대한 제한과, 어떤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영역/틀의 구성요소와 그 사이의 사상/대응 관계는 그림에 나타낸 걸로 충분해 보이므로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다.

여기서 약간 응용된 표현으로 영어의 'push the line'이라는 것이 있다.
(개념적 은유나 개념적 혼성으로 구성된 틀이 그 자체로 새로운 구조를 얻어 응용되는 걸 가리키는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예전에 봤던 유튜브 영상에서 가벼운 예를 하나 들자면 이런 게 있다.

Jolly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한 명이 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납골함'을 주자,
'There are some lines and boundaries we don't' cross'라고 이 개념적 은유를 환기한 후에,
'This is pushing the line'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엽기적인 선물이라서) 이처럼 'push the line'은
정해진 경계 안에서 이동/거류하는 자가 자신의 구역을 넓히고자 울타리를 밀듯이 (실제 세계에서는 울타리라는 게 민다고 밀어지지는 않지만)
행동하는 자가 자신에게 허용되는 행동 양식의 범위를 더 다양하게 하고자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넓히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선을 넘는다'라는 개념적 은유가 한국어에서도 사용되는데
(영어권에서 수입된 건지 그 전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push the line'이라는 건 한국어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막의 번역도 부득불 '넘을랑 말랑이다'라고 되어 있다.)
같은 개념적 은유가 있어도 언어 표현에서는 차이가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인 것 같다.

한편 약간 당황스러운 예도 발견했는데,
'선 넘는' 행동을 자꾸 하니까 그 행동을 당한 사람이 '선이 기네?'라고 반응하는 사례였다.

이 영상에서 볼 수 있었다.


개념적 은유의 구조가 저 위의 그림과 같다면,
내 생각에 여기서 나왔어야 하는 반응은 '선이 기네'가 아니라 '선이 굵네'라거나 '선이 넓네'이다. 그러나 언어학은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설명할 길을 찾을 뿐
언중에게 뭐라고 말하라고 처방하는 게 아니므로,
내가 세워 본 이론에 대한 저 반례에 대해 또 뭐라고 설명할 보조 가설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게 뭘지는 잘 모르겠다. 개념적 혼성이라거나......
혼성이면 무슨 틀과의 혼성이지...

++ 선을 '세게(왠지 보통 '씨게'라고 표현되는 거 같은데)' 넘는다는 것도 근원 영역에서는 말이 안 되는 타겟 영역에서의 고유한 개념인 거 같다.

(+ 사실 '수용 가능'이라거나 '수용 불가능'에 나오는 '수용'도 은유적인 표현인 것 같다.
IDEAS ARE OBJECTS라든지... '수용'이 '받아들인다'는 거니까
인지언어학 수업을 들을 때도 느꼈지만
구체적인 개념에 대한 참조/은유 없이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란 참 쉽지 않은 듯.)
출처
Jolly 영상: https://youtu.be/02gywj4U9tw?t=514
보물섬 영상: https://youtu.be/ekTmvPebxUg?t=273


작년에 이런 메모를 적어뒀던 걸 보고 써 보았다.

메모장에 재미있는 거리가 많은 것 같은데 놔두면 그냥 잊어버릴 뿐이니까
종종 들춰 보면서 이런 식으로 블로그에 남겨 봐야겠다.

늘 그렇듯이 질문과 댓글과 잘 아시는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환영하고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