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라면 단순 반복 작업은 뭐든 할 수 있는 코드를 만들어야 할 수 있지"
내가 실제로 했던 말실수다. 원래는 '프로그래머라면 단순 반복 작업은 뭐든 할 수 있는 코드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 꼬였다.
(원래 하려던 말도 좀 이상한데, 내 말 뜻은 하나의 코드로 모든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임의의 단순 반복 작업에 대해 그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코드를 하나씩은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내 의도는 내가 아니까 원래 말하려던 게 '...만들 수 있어야 하지'라는 것도 확실하고, 실제로 말한 문장이 말실수라는 것도 확실하다.
위 말실수 사례는 '-ㄹ 수 있-'의 통사적 단위성 (즉 구문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ㄹ 수 있-'을 더 분석해서 관형절+의존명사 주어에 서술어가 붙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ㄹ 수 있-'은 하나의 통사적 단위(구성성분constituent)가 아니게 된다.
왜냐면 그런 이론에서는 보통 대략 이러한 구조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CP어말어미구
[TP선어말어미구
[AuxP보조용언구
[CP어말어미구
[TP선어말어미구
[NP명사구
[CP어말어미구
[^TP선어말어미구 ... 만들 ]
[C어말어미 ㄹ ] ]
[N명사 수 ] ]
[T'
[VP용언구 [V용언 있 ] ]
[T선어말어미 0] ] ]
[C어말어미 어야] ]
[Aux보조용언 하] ]
[T선어말어미 0] ]
[C어말어미 지 ] ] 어떻게 보아도 '-ㄹ 수 있-'은 하나의 단위를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만들 수 있어야 하지'를 말하려다가 '만들어야 할 수 있지'라고 실수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ㄹ 수 있-'이 통째로 '하-'의 뒷자리에 잘못 끼워넣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그럴듯하다. 만들 수 있어야 하지 만들어야 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 위에 그린 수형도와 그런 구조를 가정하는 이론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론 (최근에 과학철학에 대해 배운 것인데) 데이터가 하나 있을 때 그 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의 종류는 무한히 존재하므로, 이 말실수에 대해 '-ㄹ 수 있-'이 통째로 잘못 들어갔다는 설명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위에 그린 수형도는 아주 단순화한 것이지만 실제 주류 변형생성문법의 수형도에는 저기 나타난 것 이외에도 온갖P들이 있으므로, '-ㄹ'이 잘못 끼워질 자리, '수'가 잘못 끼워질 자리, '있-'이 잘못 끼워질 자리 하나씩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ㄹ', '수', '있-'를 인출할 때 전부 각각 한번씩 총 세 번 이상의 회로 꼬임이 따로따로 발생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냥 '-ㄹ 수 있-'이 한번에 오인출되었다고 말하는 게 직관에 더 부합하는 것 같다.
결국 나도 별달리 확실한 근거 없이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이 말실수 데이터가 '-ㄹ 수 있-'의 구문성을 논리적으로 증명verification하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 완전히 환원적인 분석에 대한 반입증disconfirmation은 되지 않나 한다. (이렇게 쓰는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한편 '-ㄹ 수 있-' 안에 '-가', '-는', '-도' 등의 요소가 여전히 끼어들어 '-ㄹ 수가 있-', '-ㄹ 수는 있-', '-ㄹ 수도 있-'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ㄹ 수 있-'을 아예 하나의 어휘로 보는 atomic한 분석에 대한 반입증이 된다. (이 경우에도 '-ㄹ수가있-', '-ㄹ수는있-', '-ㄹ수도있-'을 각각 독립된 하나의 어휘로 등재하는 방법이 있으므로 논리적인 반증falsification이 되지는 않는다.)
'-ㄹ 수 있-'이 구문성을 갖는다는 구문문법스러운 이론은
양쪽의 데이터를 모두 고려하여 '-ㄹ 수 있-'이 완전히 atomic한 어휘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환원되어 단위성을 갖지 못하는 구성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만 이러한 말실수 이외의 독립적 근거가 필요할 텐데, 어떤 게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원어민의 띄어쓰기에서 '할수있다' 같은 표기가 흔하게 보이는 것도 부차적이고 간접적인 지지 근거가 될 수는 있겠다. 북한에서는 아예 그걸 정서법으로 정했고... 다만 띄어쓰기에 반영되는 음운적 의존성은 문법적 단위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게 아니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또는 '의미적인 응집성' 같은 게 있을지도...
+ 여기에서 다룬 말실수는 2021년 12월 14일 16시 29분에 메모장에 적어 두었던 것이다. + 아주 약간 관련 있는 포스팅
'언어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어학의 매력을 전도하는 법 (+ 근황) (0) | 2022.12.31 |
---|---|
광동어와 베트남어 한자음의 비교 - 日과 一 (2) | 2022.10.23 |
'선 넘네', 'push the line' - 개념적 은유 (0) | 2022.09.16 |
능격-절대격은 무엇이고 왜 쓰이는가? (0) | 2022.09.13 |
'낙뢰'와 표준 발음법과 국어 교육에 관한 단상 (0) | 2022.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