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

[언어유형론] 중국어의 어순이 특이한 이유 - 관계절과 SVO 어순

cha5ylkhan 2024. 8. 4. 16:14

중국의 역사 드라마 <연희공략>을 얼마 전에 정주행했다.

중드 연희공략(延禧攻略) 간략 리뷰 + 대사 받아쓰기

청나라 건륭제 때의 비빈 암투를 다룬 ‘사이다패스’ 드라마 연희공략(延禧攻略 yan2 xi3 gong1 lve4)을 7...

blog.naver.com


드라마를 보다 보니 문득, 중국어의 문법에 대해 새삼 특이한 점이 느껴졌다.

"可是她是一个连自己都保护不了的可怜人。"
[그러나] [그는] [이다] [한 명의] [자기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
"그러나 그는 자기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어."

위 문장을 보면, 관계관형절 '자기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은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 '(불쌍한) 사람'의 에 위치한다.
중국어가 동사를 목적어 앞에 두는(VO) 언어임을 고려하면 이것은 아주 특이한 일이다.

왜냐면 VO언어의 약 99%*가 관계절을 명사 뒤에 두기 때문이다. (영어의 어순을 생각하면 된다.)
*온라인 언어유형론 데이터베이스 WALS(World Atlas of Language Structure Online) 기준

(위 예문이 전형적인 타동사 구문은 아니지만, 계사 뒤에 보어가 등장하는데 그 보어의 어순 구성이 [관계절-명사]라는 점에서 V-O[Rel-N] 어순을 언뜻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드라마에서 [수사+양사 뒤에 나오는 관계관형절]이나 [개사(전치사)의 목적어를 수식하는 관계관형절]이 등장하면 왠지 특별히 더 이색적인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보자.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다'라는 말을 세계의 여러 언어로 표현한다면 각각 어순이 어떻게 될까?

관계절과 명사의 어순(관계절-명사 vs 명사-관계절)은 '오르지 못할 - 나무 vs 나무 - 오르지 못할' 둘 중 하나가 될 것이고,
동사와 목적어의 어순(목적어-동사 vs 동사-목적어)은 '나무를 - 쳐다보다 vs 쳐다보다 - 나무를'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상의 경우들을 교차분류하면 아래와 같은 2*2 표를 만들 수 있다.

(여기 제시하는 언어 개수 자료는 모두 WALS를 기준으로 한다.)

- 한국어와 같이 '오르지 못할 - 나무를 - 쳐다보다' 순서로 표현하는 언어는 전세계에 약 132개 있다고 한다. (OV & Rel-N)
- '나무를 - 오르지 못할 - 쳐다보다' 순서로 표현하는 언어로는 예를 들어 이란어(페르시아어)가 있고, 이러한 언어는 약 113개 있다. (OV & N-Rel)
--> 목적어-동사(OV) 어순의 경우에는 관계절이 명사 앞에 나오는 언어도 많고 관계절이 명사 뒤에 나오는 언어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사-목적어(VO) 어순인 언어들을 보면 매우 편향된 결과가 나타난다.
- 영어처럼 '쳐다보다(look up) - 나무를(a tree) - 오르지 못할(you can't climb)' 순서로 표현하는 언어는 무려 416개가 보고된 반면에, (VO & N-Rel)
- 중국어처럼 '쳐다보다 - 오르지 못할 - 나무를' 순서로 표현하는 언어는 전세계에 겨우 5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VO & Rel-N)
 

https://wals.info/combinations/90A_83A#1/24/153

 

그 목록을 자세히 살펴 보면 놀라움이 더한다. 전세계에서 딱 5개 보고된 [VO & Rel-N] 언어 중 무려 3개가 중국어의 '방언', 또는 중국어파 언어(Sinitic languages)이기 때문이다. (표준 중국어, 광동어, 객가어. 다른 '방언'들도 살펴보면 [VO & Rel-N]의 사례가 더 많이 나올 듯도 싶다.)

심지어 나머지 두 개 언어가 [VO & Rel-N]의 어순을 갖게 된 것 또한 중국어의 영향일 가능성이 있다.

WALS의 해당 챕터를 집필한 Dryer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VO & Rel-N 유형의 언어들] are distinctly rare. Apart from Mandarin and other varieties of Chinese, the only other cases on the map are two languages in close geographical proximity to Chinese, namely Bai, a Tibeto-Burman language of China that has been heavily influenced by Chinese, and Amis, an Austronesian language of Taiwan (Joy Wu, personal communication), where there is also a possibility of influence from Chinese."

한마디로, 중국어(의 방언들)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언어들을 제외하고서는 전세계에서 동사-목적어(VO) 어순을 지니면서 관계절을 명사 앞에 위치시키는(Rel-N) 언어가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다. (적어도 WALS에는 올라 있지 않다.)

중국어의 관계절 어순은 실로 이만큼 특이한 것이다.
 

전세계에서 이렇게 딱 다섯 개 언어만 VO이면서 Rel-N이다. (지도 출처 WALS)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독자는 언어유형론 교재 및 아래 WALS 링크를 참고하시길:
https://wals.info/chapter/96

WALS Online -             Chapter Relationship between the Order of Object and Verb and the Order of Relative Clause and Noun

1. Defining the values This is the second of three maps that show the relationship between two features that are shown separately in earlier maps, namely the order of relative clause and noun (Map 90A) and the order of object and verb (Map 83A). The two or

wals.info

 
 


 
https://blog.naver.com/ktb2024/223535977110

중드 연희공략(延禧攻略) 간략 리뷰 + 대사 받아쓰기

청나라 건륭제 때의 비빈 암투를 다룬 ‘사이다패스’ 드라마 연희공략(延禧攻略 yan2 xi3 gong1 lve4)을 7...

blog.naver.com

위에 받아쓴 <연희공략> 대사 중에 '严禁任何人此事以论'이라는 말이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몰라도 ‘엄금’은 정말 엄격 근엄 진지하게 금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yánjìn’ 하니까 구개음화 때문인지 좀 귀엽달까 어감이 훨씬 약한 느낌이 든다. 음성상징? 명나라 사람 부산이 느꼈을 감정이 이런 걸까 ㅋㅋ
실제로 베트남어의 'nghiêm cấm'은 나한테는 '엄금'처럼 엄근진한 어감이 든다.
혹시 고모음일수록, 전설모음일수록 음성상징에선 작은 것에 연결되곤 하나? 종성(운미)도 두 음절 다 m이 아니라 n이 나오니까 원래보다 약한 느낌.
 
 
 

+ '중국어의 어순이 특이한 이유'라는 제목은 약간 misleading한데, 중국어의 어순이 특이하게 발달한 역사적/기능적 이유를 말하는 게 아니고, ‘중국어의 어순이 특이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이유’라는 뜻이다. 전자와 같은 '이유'를 설명하는 게 더 가치있는 목표가 되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

+ 본문에 2*2의 속 편한 표를 제시하긴 했지만, '어느 언어의 어순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문장의 어순은 형태론적 격 표지의 유무, 정보구조적인 요인 등에 의해서 매우 다양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 표에 제시한 한국어, 중국어, 이란어는 영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어순이 훨씬 자유로운 언어들이고, 또 영어 문장이라고 해서 항상 목적어가 동사 뒤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언어유형론 연구자들이 여러 언어의 어순을 비교할 때는 여러 기준에 의해서 각 언어의 '기본 어순'을 도출해 내는데, 늘 다양한 논란이 뒤따르는 것 같다.

+ 관계화 전략(relativization strategy)이 언어마다 다르다는 점 또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영어의 어순을 '쳐다보다 - 나무를 - 오르지 못할'과 같이 표현했지만 이런 표기에서는 영어의 관계화 전략이 '관계대명사'라는 점이 드러나지 못한다.

+ 괜히 좀 있어 보이는 예문을 쓰고 싶어서 유명 어록, 속담 이런 걸 쭉 훑어 보면서 한참을 고심했는데 마땅한 게 잘 없었다. 목적어에 관계절이 포함되는 문장이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주어의 관계화와 사격어의 관계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좀 더 고민했던 점도 있었는데 여기서 제대로 고려하기는 어려운 문제 같아서 일단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이란어를 잘 모르니 WALS에 OV & Rel-N 유형으로 실려 있다 해도 이 글에 가져다 쓰기가 좀 불안했는데, 위키백과에 첨부된 링크를 통해 Mace, John (2003). Persian Grammar: For Reference and Revision. Routledge Curzon. 라는 자료에 접근해서 아래와 같은 사례를 확인했다.

 

کتاب هایی] [را] [ [که] [خریده ام] ] [گم کرده ام]
[ketābhāi 책들] [rā 을] [ [ke 관계대명사] [xaridam - 내가 샀다] ] [gom kardam - 내가 잃어버렸다]

 


 

요약

중국어의 어순은 동사-목적어(VO)이면서 관계절-명사(Rel-N)이다.

WALS에서 관계절-명사의 어순과 동사-목적어의 어순을 교차분류(cross-classify)해 보면 중국어의 관형절이 얼마나 특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전세계 언어들 중 중국어처럼 목적어가 동사 뒤에 나오는(VO) 언어는 거의 99%가 중국어와 달리 관계절을 피수식 명사 뒤에 등장(N-Rel)시킨다.

WALS 데이터베이스에 올라 있는 수많은 언어 중에 목적어가 동사 뒤에 나오면서(VO) 관계절이 피수식 명사 앞에 나오는(Rel-N) 언어는 딱 다섯 개밖에 없다. 그 중 세 개가 중국어의 ‘방언’이며(Sinitic languages), 지역적으로 말하자면 다섯 개 언어가 전부 비슷한 지역에서 쓰인다. (WALS에서는 Sinitic이 아닌 나머지 두 개 언어도 중국어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 SVO로 제한하면 Amis어가 제외되기 때문에 4개로 줄어든다.


한 마디로,
동사-목적어(VO) 어순을 취하면서 관계절을 명사 앞에 두는(Rel-N) 언어는 중국어가 거의 유일하다.

Bai어와 Amis어는 중국어와 전혀 다른 별개의 언어지만, 만약 [V와 O의 어순]과 [Rel과 N의 어순] 사이의 상관관계 연구를 위해 표본을 구축하는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 표본에 중국어를 넣었다면 Bai어와 Amis어는 제외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계통적 편향뿐만 아니라 지역적 편향 또한 표본에서 제거하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 V O[Rel-N] 어순이 유형론적으로 특이하니, 혹시 목적어가 관계절의 수식을 받을 때는 把자 구문의 사용 빈도가 더 높아질까?

“把 O[Rel-N] V” 이런 어순은 (전치사 vs 후치사만 빼면) 한국어 유형과 같으므로 유형론적 특이함을 유발하는 모종의 부담이 덜할 것 같다.

코퍼스에서 관계절 수식을 받는 목적어들을 쭉 모아다가 把자 구문의 출현 빈도가 절반 이상인지 보거나,

관계절 수식을 받지 않는 목적어에서의 把자문 출현 빈도를 관계절 수식 받는 목적어에서의 把자문 출현 빈도와 비교하거나

해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把刚才对本宫说的话,向皇上禀报一遍吧。
방금 본궁에게 한 말을 폐하께 말씀드려라.
를 듣고 떠오른 생각.
‘품의’할 때 禀 자가 bing3으로 저 대사에 등장하는데 이 또한 expected Mandarin reflex (bin)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