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라는 의미와 '하늘'이라는 의미가 어원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된 사례들이 있다. (후술하겠지만, 전세계적으로 최소한 100개 이상의 언어에서 관찰되었다.)
영어의 sky도 원래는 '구름'이라는 뜻으로 쓰이던 말이었다.
모 카페에서 '구름 요거트 스무디'를 먹으면서 생각났던 거라 그 사진을 올리고 싶었는데 그건 미처 사진을 못 찍었다.
이제는 sky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초등학생도 하늘이라 답하겠지만,
sky는 중세 영어(Middle English)가 쓰이던 13세기경에만 해도 주로 '구름'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14세기쯤에 sky가 '하늘'이라는 뜻으로 쓰인 예가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당시에도 sky는 여전히 '구름'이라는 뜻을 같이 유지하고 있었다.
* 한편 sky가 '하늘'의 뜻을 얻기 전에는 heofon이 '하늘'을 나타내는 말로 주로 쓰였는데, 이 단어는 현대 영어 heaven의 선대형이다.
사실 sky는 원래 영어 단어가 아니라 고대 노르드어* 단어 'ský'에서 차용된 말이다.
고대 노르드어에서도 ský는 '구름'이라는 의미였다. (다만 복수형으로 쓰이면 '하늘'이라는 뜻도 나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 Old Norse.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언어들 및 아이슬란드어나 페로어 등의 조상 언어.
이상 나열한 언어에서 'sky' 및 그 후대형은 주로 '구름'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하늘'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PIE 단계에서 '덮다, 숨기다' 등의 의미로 쓰이던 *(s)kewH- 라는 말이 '구름'이라는 뜻의 ský를 만들어낸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하여튼 영어의 'sky'는 ['구름' > '하늘']이라는 의미 변화를 겪은 것이다.
한편 영어의 친척 언어들에서도 유사한 의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꽤 재미있는 우연이다.
영어,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체코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알바니아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이란어, 힌디어 등등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모든 언어들의 공통 조상 언어인 원시 인도유럽 조어(Proto-Indo-European, PIE)
에는 *nébʰos 라는 단어가 있었다고 한다.
이 *nébʰos 는 원래 '구름; 안개~습기'라는 뜻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시 인도유럽 조어가 점차 여러 후손 언어로 분화되면서 *nébʰos 또한 각 후손 언어로 계승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몇 개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 고전 그리스어 néphos (νέφος) '구름'
- 라틴어 nebula '구름, 안개, 증기'
*영어에 차용되어 '성운'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마블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이기도 하다.
- 산스크리트어 nábhas (नभस्) '구름, 안개, 증기'
* 본문 주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비교언어학의 아버지' 윌리엄 존스는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서 이 언어가 고전 그리스어(헬라어)나 라틴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 언어가 하나의 공통 조상 언어로부터 갈라져 나왔을 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이 담긴 그의 1786년 연구로부터 '비교언어학' 그리고 '인도유럽언어학'이 시작되었다. 다만 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그가 이러한 주장을 처음 펼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한편 원시 인도유럽 조어의 *nébʰos 를 *nebo 라는 형태로 계승한 후손 언어 원시 슬라브어(Proto-Slavic)에서는 이 단어의 뜻이 '구름'이 아니라 '하늘'로 바뀌어 버렸다. 원시 슬라브어의 후손인 슬라브어파 언어들에서 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남슬라브어군 마케도니아어 небо(nebo), 불가리아어 небе(nebe) '하늘 ~ 천국'
- 서슬라브어군 슬로박어 nebo, 체코어 nebe, 폴란드어 niebo '하늘 ~ 천국'
- 동슬라브어군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небо(nebo) (표기는 똑같지만 발음은 다르다), 벨라루스어 неба(neba) '하늘 ~ 천국'
*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는 이 단어를 원시 슬라브어로부터 직접 계승해 온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 슬라브어(Old Church Slavonic, OCS)로부터 차용해 온 것이다.
+ 위에 언급한 산스크리트어 nábhas (नभस्, '구름') 또한 나중에는 '하늘 ~ 천국'의 뜻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처럼 인도유럽어족의 *nébʰos 에서도 영어의 sky에서와 같은 ['구름' > '하늘']의 의미변화가 나타난다.
'sky'와 'cloud'를 연결하는 선의 굵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구름'과 '하늘'을 같은 어휘로 표현하는(colexification) 언어의 사례는 무려 102개나 보고되어 있으며,
이 중에 인도유럽어족 언어는 위에 언급한 중세영어와 스웨덴어 단 둘뿐이다.
나머지 100개는 인도유럽어족과 전혀 무관한 언어에서 관찰된 사례들인 것이다.
'구름'과 '하늘'을 맨 처음 연결지을 당시의 언어사용자들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조악하게 나름대로의 가상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자면,
말하는 이가 하늘을 보면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 대해 'X'라고 말할 때
듣는 이 중 누군가는 아마 말하는 이와 함께 하늘을 보면서 구름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 듣는이는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X'라는 말을 하늘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럴 때 쓰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바가이 문제도 떠오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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