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어를 문자로 적는다?!
미국수어 '고맙습니다'
미국수어 '고맙습니다'를 SignWriting으로 쓴 것
미국수어 '고맙습니다'를 수어 문자 SignWriting으로 쓰면 위와 같이 된다.
- 표정(비수지)이 '웃는 표정'이라는 것과 손이 닿는 위치(수위)가 '턱'이라는 정보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고, (규칙에 의한 표기이겠지만)
- 얼굴 아래에 붙어 있는, 꼭대기가 뾰족한 집 모양(?)은 모든 손가락을 서로 붙인 채로 편 손모양(수형)을 뜻한다.
- 위를 향하는 한 줄짜리 화살표는 '수어하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손의 움직임(수동)을 나타낸다.
- 손을 나타내는 그림이 흰색이라는 것은 이 수어를 할 때 '손바닥이 수어하는 사람 쪽을 가리킨다'는 뜻이다.(수향)
미국수어 '고맙습니다'를 스토키 표기법으로 쓴 것
동일한 수어 표현을 또다른 수어 문자인 스토키 표기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 맨 왼쪽의 곡선은 '턱'이라는 위치(수위)를 나타내고,
- B는 네 손가락을 편 손모양(수형) (지문자 B, 한국수어 '9형'),
+ 그 위에 점이 붙어서, 그 상태에서 엄지손가락까지 편 손모양을 나타내고,
- 아래첨자 ⫟는 '손바닥의 방향(수향)이 수어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뜻,
- 위첨자 ⫠는 손의 움직임(수동)이 수어하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이라는 뜻이다.
음성언어를 문자로 적으려면 어떤 정보를 표시해야 할까? (단, 의미 내용이나 형태소가 아닌 소리 형식을 주로 표시하는 표음문자일 경우)
아마도 한글이나 로마자처럼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여 나타내는 편이 많을 것이고, 그러지 않더라도 일본의 가나 문자처럼 최소한 음절 단위는 구분해서 쓰는 것이 보통인 것 같다.
수화 언어의 경우는 어떨까?
수어의 몸짓이 언뜻 체계적이지 않고 구조가 없는 흉내 정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수화언어의 형식('발음')도 음성언어와 같이 몇 개의 이산적인 단위로 구성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수형, 수향, 수동, 수위 등이 그것이다. (손 이외의 수단으로 실현되는 '비수지' 또한 중요하다.)
음성언어에서 '발' vs '팔'처럼 하나의 자음이 달라지면 의미가 달라지는 최소대립쌍이 있듯이,
수화언어에서도 어떤 단어의 수형, 수향, 수위 중 어느 하나를 바꾸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새로운 단어가 되고 최소대립쌍이 만들어진다.
한국수어의 경우는:
- '닭'에서 손모양(수형)을 바꾸면 '경찰'이 되고,
국립국어원 한국수어사전 '닭', '경찰'
- '연습하다'에서 손바닥의 방향(수향)을 바꾸면 '청인'이 되고,
국립국어원 한국수어사전 '연습하다', '청인'
- '궁금하다'에서 수위를 바꾸면 '심심하다'가 된다. (개인적으로 맨날 헷갈려서 잘못 쓰는 단어)
국립국어원 한국수어사전 '궁금하다', '심심하다'
하여튼 이렇게 수어의 '발음'에도 음성언어의 '자음', '모음'(또는 그 이하의 단위)에 대응하는 기초 단위가 있기 때문에, 수어를 글로 적을 때도 비슷한 방식의 분석과 분절이 이루어진다.
수어 음운론이 이렇게 음성언어 음운론과 동일한 원리로 되어 있음을 밝히면서 수어 언어학 분야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언어학자 윌리엄 스토키는, 자신이 분석한 수어의 음운 체계(아마 본인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를 새로운 문자 시스템으로 나타내었다.
2. 수어 문자를 알려주는 책 & SignWriting
수어(수화)를 문자로 표기하고 읽는 방법에 대한 책이 자가출판플랫폼 부크크에 있어 구매해 보았다.
언어학 방의 수어 파생방 방장님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고서 언젠가 사야지 마음먹었었는데, 전에 뵈었던 농인 선생님도 구매하신 걸 보고 자극을 받아서 질렀다.
내용물은 이렇게 생겼다.
페이지마다 쪽 번호를 나타내는 지숫자가 적혀 있는 게 깨알같고 좋다.
이 책의 제목은 그냥 '수어 문자'이지만, 구체적으로는 SignWriting이라는 문자 체계를 알려주는 책이다.
사실 수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는 이 책에서 가르쳐 주는 SignWriting 말고도 여러가지가 있다.
내가 들어 본 수어 문자 체계는 크게
- 스토키 표기법(Stokoe notation),
- 함노시스(HamNoSys; Hamburg Sign Language Notation System),
- ASL-phabet
등이 있다.
(함노시스나 ASL-phabet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뤄 보고, 스토키 표기법에 대해서만 이따가 가볍게 이야기하겠다.)
다만 세계 농인들 사이에서 가장 활발히 사용되는 문자체계가 SignWriting이니만큼, (심지어 모든 게 SignWriting으로 적혀 있는 위키백과의 미국수어 번역본도 있고, SignWriting으로 쓰인 논문도 있다.)
SignWiting 교재가 '수어문자'라는 일반적인 이름을 취한 데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에 실린 예문/예시 단어들은 한국수어로 되어 있다. 새삼스레 이걸 왜 언급하냐면, 이 책이 원래 한국에서 나온 게 아니라 외서를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원서는 영어로 되어 있고, SignWriting으로 스페인수어(LSE; Lengua de Signos Española)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러니까 원서에 나와 있는 표기 예들은 다 스페인수어로 되어 있을 것이고, 번역 출판 과정에서 맥락에 적절한 한국수어 단어로 바꿔 넣은 모양이다.
원서가 영어로 된 책인데 왜 미국수어나 영국수어가 아니라 스페인수어 표기를 알려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미국인들이 익숙해할 만한 ASL(미국수어) 말고 스페인수어로 SignWriting을 배우면 수어보다 문자체계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건가?
SignWriting 공식 홈페이지에서 원서 pdf 파일을 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조금 찾아 봤지만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틈나는 대로 책을 보고 익혀서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추면 좋겠다.
3. 스토키 표기법(Stokoe notation)
스토키 표기법(Stokoe notation)은 수어 언어학 분야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언어학자 윌리엄 스토키(William Stokoe)가 처음 만든 표기 체계이다.
스토키 표기법으로 ASL(미국수어)을 적은 것
딱 봐도 SignWriting에 비해 훨씬 추상적이고 덜 도상적이다.
SignWriting은 개별 수화언어만을 위한 표기법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어떤 수화언어든지 동일한 문자 시스템으로 표기하고자 하는, 음성언어로 치자면 IPA에 대응하는 '음성기호'인 반면에,
스토키 표기법은 구체적으로 미국수어만을 위한 음소적 표기법이다. (이후 다른 수화언어 표기를 위한 확장판 표기법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스토키 표기법은 세계 수어에서 발견되는 모든 형식을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고, 미국수어에서 변별적인 음소만 표시하며, 미국수어 기준 '변이음'은 구별해서 표시하지 않는다. 지식이 일천하여 예시를 제대로 들지는 못하지만...
영문 위키백과 Stokoe notation 문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Stokoe notation is] restricted to the symbols needed to meet the requirements of ASL (or extended to BSL, etc.) rather than accommodating all possible signs. For example, there is a single symbol for circling movement, regardless of whether the plane of the movement is horizontal or vertical.
스토키 표기법의 한 단위(음절? '기본적인 한손 수어를 나타내는 단위')는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하 스토키 표기법에 대한 설명은 여기를 참조하였음)
LHOM
Location수위, Handshape수형, Orientation수향, Movement수동
위에서 봤던 이 예시에서도 그런 구조를 알아볼 수 있다.
L(수위): 턱 기호 / H(수형): B기호 / 아래첨자O(수향): ⫟기호 / 위첨자M(수동): ⫠기호
스토키 표기법이 그랬듯이, 도상성을 포기하더라도 지금의 전산 환경에서 좀 더 접근성 있는 시스템으로 수어를 적을 수는 없을까 생각하다가, (어차피 음성언어를 적는 문자는 사실상 도상성이 없으니 수어 문자도 도상성이 꼭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수어를 문자로 적으려면 최소한 어떤 정보를 나타내야 할까?를 잠깐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수어 음운론에서 배우듯이(위에서 언급했듯이) 수형, 수위, 수동, 수향, 비수지기호를 나타내야 할 텐데,
보통 단모음을 아예 적지 않는 아랍 문자나
사실상 발음은 거의 적지 않는 한자의 예처럼
충분히 관습화되기만 한다면 단어에 따라 수형, 수위, 수동, 수향, 비수지 중에 일부 정보는 생략하거나 상당 부분 추상화하더라도 충분히 문자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관습이 지금으로서는 없다는 것이고, 그나마 관습이 생긴다면 SignWriting으로부터 생길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인다.
SignWriting은 음성기호의 성격이 있는 만큼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많은 정보를 (그러니까 예측가능하거나 의미 변별에는 불필요한 변이음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여) 표시하는 것 같은데, 만약 다수 농인의 빈번하고 일상적인 사용이 계속된다면 일부 정보는 일관되게 생략하는 관습이 생길지 궁금해진다.
한편 내가 잠깐 생각만 했던 이 수어 문자 개발(?) 문제를 우리 언어학방 수어 파생방의 방장님은 며칠에 걸쳐 탐구하고 실행했었는데,
SignWriting, Stokoe 노테이션 등을 직접 공부하고
스토키 표기법에서 하나의 단위에 LHOM이라는 구조를 부여하듯이 한글 모아쓰기를 통해 네 가지 정보를 한번에 표현하는 방식을 추구해 보다가
결국은 도상적인 문자체계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던
그런 역사를 목격했다.
우리 방장님은 수어 문자에 대한 언어학 올림피아드 창작 문제도 다수 출제하시었으니 관심이 있는 분은 방에 들어와 보시길
월요일 출근길에 작성하기 시작해서 그동안 출근길 퇴근길에 조금씩 조금씩 쓰다가 토요일이 되어서야 올린다.
이번주는 거의 매일 야근이라 힘들었지만 출퇴근길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이렇게 평일에 틈나는 대로 써서 주말에 올리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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