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대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터키(튀르키예) 사극 <위대한 세기(Muhteşem Yüzyıl)>의 시즌1 1화를 시청했다. Wavve에서 시청할 수 있다.
(원작의 1화 분량이 Wavve에서는 두 개 에피소드로 나뉘어 실려 있다. 나는 Wavve에서 2화까지 시청했으므로 원작 기준 1화를 본 것이다.)
주인공이 노예의 신분으로 오스만 제국에 팔려왔다가 황제의 환심을 사서 제국 최초의 황후로 등극하는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후궁들과 싸우며 점점 위로 올라가는 내용이 주된 줄거리인 듯.
스토리 구조상 얼마 전에 시청했던 중국의 사극 <연희공략>과 비슷해서 자꾸 떠오른다. 비교하며 보는 맛이 있다.
https://m.blog.naver.com/ktb2024/223535977110
<연희공략>에서는 주인공이 기존의 황후에게 충성을 다하고, 황제와는 오히려 척을 지며 티격태격하는 시간이 매우 길다.
그런데 <위대한 세기>에서는 주인공이 [기존의 황후...는 아니지만 대략 비슷한 포지션의 인물]에게 적대감을 갖고, 첫 화부터 황제의 관심을 끌며, 주인공과 황제가 잠자리를 함께하기 직전 상황까지 급속도로 전개된다. 적어도 황제는 벌써 주인공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헤롱헤롱한 상태가 된 것 같다.
드라마 전체 분량은 <연희공략>보다 <위대한 세기>가 훨씬 더 많은데 벌써 이렇게 관계가 진전되다니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다. 1화 마지막의 반전 장면을 보면 대략 예상이 되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동기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다.
<연희공략>의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황제의 환심을 사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기는 하지만, 높은 지위라든가 황제의 환심은 수단에 불과하고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아끼는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것, 또는 주변 사람들의 복수를 하는 것이다.
반면 <위대한 세기>의 주인공은 (일단 1화까지 본 바로는) 주변 사람들은 딱히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만 황제를 이용하려는 모습인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미 타타르인들의 손에 모조리 죽어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시작 부분도 차이가 많다.
<연희공략>은 주인공이 자금성에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위대한 세기>에서는 주인공이 먼저 나오는 게 아니라 쉴레이만 대제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쉴레이만 대제가 '나는 누구다. 나는 누구와 누구의 아들이고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나는 누구에게 무슨 교육을 받았다. 블라블라'하면서 자기 내면의 생각을 한참 독백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런 부분은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약간 없어 보였다.
아무리 이제 막 등극한 초짜 황제라 해도 명색이 황제인데 무슨 초등학생이 일기 쓰는 것마냥 '나는... 나는...'하면서 자기소개하는 장면이 쭈욱 이어지니 좀 위엄이 없달까...
<연희공략>의 건륭제는 적어도 초반에는 내면을 잘 보여주지 않아서 더 신비롭고 위엄있게 느껴졌던 것 같다.
다만 <위대한 세기>는 13년 전의 드라마라는 점을 고려해야겠다.
그래도 쉴레이만 대제의 독백 구간이 끝나고서부터는 나이 지긋한 신하들이 깍듯하게 대접하는 모습에서 오스만 황제로서의 위엄이 느껴지기는 했다.
주인공은 오스만 제국 수도로 향하는 노예선(?) 안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연희공략>의 주인공보다 훨씬 '빠꾸 없는' 모습이 이어진다.
주인공이 줄곧 오스만 제국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죽이라고 반항하니,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인 건 우리가 아니라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이다'라며 오스만 제국 측 인물들이 난처해하는 듯한 장면도 있었던 듯.
제국 수도에 도착한 이후로도 계속 난동을 피우다 '황제의 사랑을 받으면 팔자 고칠 수 있다'라는 조언을 듣고 각성하는 모양이다. 그 과정이 솔직히 좀 갑작스럽기는 하다.
황제가 가까이 두고 아끼는 매 조련사 '이브라힘'이라는 캐릭터도 흥미로웠다. 기독교 지역(베네치아?)에 살다가 어린 나이에 오스만 제국으로 잡혀와(?) 개종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겪는 차별이나 내적 혼란을 묘사하던데 앞으로 스토리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궁금하다.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가 황제를 알현할 때 통역이 불충분한 것을 보고 이브라힘이 '내 어머니가 베네치아 사람이다'라며 나서서 통역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아래에는 (주로 언어와 관련한) 자잘한 감상 및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다.
- 늘 느꼈듯이 터키어의 어말 /r/ 발음은 아름답다. 무성음화+마찰음화. (어쩌면 언젠가 -s로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은 소리. 만약 그렇게 된다면 후술할 튀르크어족의 역사가 흥미롭게도 반복되는 모습이 될지 모른다.)
- 위키백과 Turkish phonology 문서의 모음사각도를 보면 터키어의 /y/는 [y]라기보다 더 중설에 가까운 [ʏ]인데, 그래서 그런지 극중에 자주 등장하는 'Sultan Süleyman'이라는 말은 내 귀에 얼핏 'Sultan Suleyman'처럼 들린다. 자막에 '술레이만'이라고 적혀 있어서 더 그렇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 첫 장면에서 쉴레이만 대제가 받는 편지나 나중에 등장하는 지중해 주변 지역의 지도(,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나올 오스만 제국의 모든 문서들)는 아랍 문자로 적혀 있다. 내가 아랍 문자를 잘 못 읽기도 하고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몰라서, 이 편지 등이 오스만 튀르크어를 아랍 문자로 적은 건지 아니면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를 적은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궁중에서의 주된 문어가 아랍 문자로 적힌 오스만 튀르크어였는지 아니면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였는지? (한편, 오스만 튀르크어는 현대 터키어(튀르키예어)에 비해 아랍어나 페르시아어 차용어가 무지 많았다고 한다.)
- 현대 튀르키예(터키)인들이 아랍 문자가 등장하는 저런 장면을 보면 어떤 느낌일지, 얼마나 읽을 수 있을지 그런 것도 막연히 궁금하다. 현대 한국인이 사극에서 한문으로 적힌 문서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일까?
- 바티칸의 높으신 분들이 쉴레이만 대제의 등극을 두고 '사자가 죽고 양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느니 뭐라느니 대화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배우들은 (아마도) 라틴어로 대화하는데 그 위에 터키어 더빙이 (싱크가 좀 어긋나게) 입혀져 있다. 개인적으로 이 더빙 때문에 현장감이 떨어져서 좀 아쉬웠다. 주인공 일행의 러시아어(?) 대화에는 자막을 넣었으면서 왜 여기서는 더빙을 입혔는지 모르겠다.
베네치아 대사가 대제를 알현하여 (아마도) 이탈리아어로 말하는 장면에서는 자막만 넣었는데(통역이 있어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대사가 혼자 일기 쓰듯이 독백하는 장면에서는 더빙이 들어갔다.
- 나무위키에 따르면, 주인공 휘렘 술탄(Hürrem Sultan)은 실제 역사에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 살던 '루테니아' 사람(, 즉 '루스'인)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자막에서도 '루테니아'라는 지명이 자주 언급된다.
주인공이 일행과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자음+연모음, 즉 구개음화된 자음의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뎨~졔'스러워야 할 소리를 '데'스럽게 발음한다든가.) 그래서 처음에는 주인공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서 왔으니까 현대 우크라이나어를 구사하는 설정인 건가 했었다. 근데 더 들어 보니 아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대사나 자막에서도 '러시아어'가 언급된다.
마찬가지로 나무위키에 따르면, 주인공(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배우 메리옘 우제를리(Meryem Uzerli)는 아버지가 터키 사람이고 어머니가 독일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터키 사람이 이 사람의 터키어 대사를 들으면 외국인의 터키어같은 어색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나는 터키어를 잘 모르니 못 느끼고 있었다. 황제 이름을 잘못 불렀다던데 그런 것도 몰랐다.)
그러니까 주인공 배우의 제1언어는 아마도 독일어인 모양이다. 독일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배우와 (아마도) 터키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배우가 서로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연기를 하니 러시아어가 어색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구개음화 말고도 러시아어 /p/ 등의 자음이 내게 익숙한 무기음 즉 ㅃ스러운 소리가 아니라 유기음 즉 ㅍ스러운 소리로 들린다는 점도 어색했다.
(설마 현대 러시아어도 우크라이나어도 아닌, 16세기 당시 그 사람들이 사용했던 모종의 슬라브어로 대사를 쓴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 원어 제목에서 볼 수 있는 Yüzyıl, 즉 '세기'라는 표현은 터키어로 '100'을 나타내는 yüz와 '해(year)'를 나타내는 yıl의 합성어이다.
https://blog.naver.com/ks1127zzang/222991252704
위 글에서 말했듯이 터키어에서 y-로 시작하는 단어들은 상당수가 야쿠트어에서 s-로 시작한다.
튀르크 조어에서 *j-였던 소리가 야쿠트어(의 조상 언어)에서는 점차 조음자끼리의 거리가 좁아지면서 파찰음(?) *ǰ 로 바뀌었고, 이것이 다시 *č로 무성음화했다가, 조음점이 앞으로 가고 조음 방법이 마찰음으로 바뀌면서 s-가 되었다고 보는 모양이다.
'100'을 나타내는 yüz와 '해(year)'를 나타내는 yıl에서도 이러한 규칙적 음운 대응이 나타난다.
'100'은 야쿠트어로 süüs(сүүс)라고 하고, '해(year)'는 야쿠트어로 sıl(сыл)이라고 한다.
- 한편 극중에서 쉴레이만 대제가 이브라힘에게 '또 별을 보고 있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별'이라는 표현이 궁금했는데 들릴 듯 안 들려서 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yıldız'였다. 터키어 '별'이 'y-'로 시작하니까 야쿠트어의 '별'은 's-'로 시작하겠군, 하는 추측을 해 보고 실제로 검색해 보았는데 정말이었다. 야쿠트어로 별은 sulus(сулус)라고 한다.
- 그런 정보를 알아보는 와중에 구글에 러시아어로 'Как по-якутски звезда(야쿠트어로 별을 뭐라고 하나요)'라고 검색했더니 엉뚱하게 '북쪽'이라는 표현이 나와서 오류 신고를 넣었다. 야쿠트어의 '북극성'이라는 표현 (хотугу сулус)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처음 검색 결과를 보고 웬 х-가 나오길래 내 추측이 틀렸나 보다 하고 잠깐 시무룩했다가, 더 검색해서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고는 다시 신이 났다.)
- 윅셔너리에 따르면, 야쿠트어 sulus(сулус)는 *čullus < *čuldus < *ǰuldus < *ǰulduz 라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 위 변화 과정에서 첫 단계(맨 오른쪽)에 등장하는 어말의 -z는 튀르크조어 *-ŕ 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ŕ소리는 튀르크조어의 여러 후손 어파들 중 유일하게 오구르어파(Oghuric)에서만 -r로 반영되었고, 나머지 공통 튀르크어(Common Turkic languages)에서는 모두 -z나 -s 등의 마찰음으로 반영되었다. 터키어(튀르키예어)와 야쿠트어는 서로 먼 친척이기는 하지만 둘 다 공통 튀르크어에 속하므로 '별'의 어말음이 둘 다 마찰음이다. (yıldız, sulus)
- 현재까지 살아남은 튀르크어족 언어들 중 오구르어파에 속하는 언어는 러시아의 추바시 공화국에서 사용되는 추바시어(Chuvash) 단 하나뿐이다. 추바시어로 '별'은 śălt̬ăr (ҫӑлтӑр) 라고 한다. 오구르어파 언어답게 어말에서 '-r'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
- 위키백과에 따르면, 과거에 튀르크어로 '부족(tribe)'을 의미하는 단어가 오구르어파 언어로는 'oghur'와 같았고 나머지 튀르크어로는 'oghuz'와 같았다고 한다. 추바시어가 속한 이 어파에 '오구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며, 오구르어파에 속하는 모종의 튀르크계 언어에서 '10개의 부족'을 의미하던 '*On oghur'라는 표현은 '헝가리(Hungary)'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 '새로운 술탄'이라는 뜻으로 'yeni sultan'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 나오는 'yeni'라는 형용사 또한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사례이다. 야쿠트어로 'new'는 sanga(саҥа)라고 한다.
- 아래 영상을 만들며 터키어 숫자를 암기한 덕인지 숫자 표현은 상대적으로 잘 들렸다.
아주 랜덤하긴 하지만 'on dokuz'(19), 'üç gün'(3일) 같은 표현이 들렸다.
- 그밖에 아래의 랜덤한 표현들을 알아들었다.
날마다 gün gün
오늘 bugün
언제 ne zaman (what + time. 중국어 什么时候랑 비슷한 구성인 듯)
girl : kız
woman : kadın
사자 aslan
밤 gece. 하룻밤 bir gece.
자막에서는 '천 번은 더 같이 자고 술탄을 자기 노예로 만들겠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음성은 '... bin bir gece ...'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 '천 한 번의 밤' 아닌가?
- 쉴레이만 대제의 어머니가 쉴레이만 대제를 부를 때 'Süleyman-ım'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맞다면 '나의 쉴레이만'이라는 뜻인가?
- 다양한 격 접미사가 등장하는데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이런 문법적인 건 아직 덜 익숙한 것 같다.
- 드라마가 시작할 때 '이 드라마의 사건들과 인물들'이라는 뜻으로 'Bu dizideki olaylar ve karakterler'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처음에 'dizideki'가 'dizidek'이라는 명사의 속격형인 줄 알고, '왜 피소유명사 부분이 olaylar-ı ve karakterler-i가 아닌 거지?'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dizidek이라는 명사가 있었다면 그 속격형은 dizidek이 아니라 dizidekin이 되었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언어학 방의 튀르크어 파생방에 질문을 올렸더니 이렇게 답해 주셔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dizidek-i가 아니라
dizi-de-ki
드라마-처격-형용사화
였던 것이다.
가르쳐 주신 분께 감사를 전한다.
(위 카톡 대화에서 내가 농담으로 '터키어중심주의' 운운하는 이유는 이 카톡방의 제목이 터키어방 또는 튀르키예어 방이 아니라 튀르크어 방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야쿠트어를 공부하는 방으로 출발했다.)
+ 나무위키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튀르키예(터키) 국내에서 (주로 이슬람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지만 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매우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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