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

언어덕후의 꼬꼬무 (ft.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cha5ylkhan 2026. 3. 21. 19:28

이하는 어느 날 퇴근길 전철역 개찰구 바로 앞에서 누군가의 옷 문구를 보고서 개찰구를 찍고 계단을 내려와 플랫폼을 밟고 몇 걸음 걷다가 벤치에 앉아 윅셔너리 검색을 하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이어진 의식의 흐름이다.

- 어느 남자가 입은 옷에 'Lemain'이라는 브랜드로고가 적혀 있었다.

- 불어 'main(손)'은 여성명사 아니던가? 근데 왜 여성 정관사 la가 아니라 남성 정관사 le가 붙었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남성명사 'main'이 또 있는가 보다. (방금 글을 쓰며 검색해 보니 'lemain'은 '리메인'이라는데 그럼 애초에 불어가 아닐지도)

(내가 처음 스스로를 언어덕후로 인식하던 중학생 때 불어를 공부했던 수단 중에는 갖가지 뮤지컬 노래가 있었다. 이건 그날 퇴근길에 떠올린 생각은 아니고 그냥 배경이 되는 정보)

-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노래 'demain'에는 'main' 음절을 가지고 라임을 맞추는 가사가 나오지. Demain, demain, demain, il aura ta main과 같은 가사. 여기 나오는 'ta main'을 보더라도 'main'이 여성 명사인 걸 확인할 수 있고. '*ton main'이 아니니까.

('내일, 내일, 내일, 그가 네 손을 가지리라'? '손을 가지다'가 뭔가의 관용구일 수도 있음. 아마 줄리엣이 원하지 않는 상대랑 강제로 정략결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줄리엣의 가족들이 주변에서 줄리엣을 향해 부르는 노래였던 듯. 프랑스 노래니까 쥘리엣트라고 해야 하나? 괄호는 모두 방금 글 쓰며 추가한 내용)

- 한편 외국어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어느 프랑스어 선생님은 불어의 'main' 음절(/mɛ̃/)을 '맹'처럼 읽으셨지. 보수적 발음? 또는 한국식 발음? ('main'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ɛ̃/를 '앵'으로 발음했다고 기억하는 걸지도 모른다. 근데 불어 선생님 발음 습관을 내가 어떻게 알지?)

- 그 선생님은 나를 두고 여러 언어 찍먹만 하면서 어정쩡하게 폴리글롯 흉내만 내는 녀석쯤으로 안 좋게 보셨었지. (그분이 옳긴 했는데...ㅋㅋ 불어가 나한텐 유독 잘 모르는 언어라 내 부족함이 그분께 있어서는 좀 과대표된 건 아닐까!)

- 보통 듣게 되는 /mɛ̃/이 내 귀에는 상당히 '망'에 가깝게 들리는데, 즉 어느 정도 중설 내지 후설모음에 가까운 방향으로 들리는데, 과거 전설모음이었던 게 연구개쪽으로 움직인 건가? 아무래도 비강으로 공기를 보내기 위해 연구개를 열려면 혀가 뒤쪽에 몰려 있는 편이 나을 테니?

- 근데 main'손'이 여성인 것도 이상하다. 스페인어 mano'손'은 남성 아닌가? (이 단어는 마찬가지로 중학생 때 We are the World 노래 스페인어 버전에서 접해서 알고 있음. 근데 사실 여성명사임ㅋ...)

- 만약 스페인어 mano가 남성명사라면(아님) 라틴어에서는 manus라는 형태의 남성명사였을 것 같은데 왜 불어 main은 여성명사가 된 걸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계단을 내려가서 플랫폼 벤치에 앉음)

(걸어다닐 땐 안전을 위해 가급적 폰을 안 보려 하기 때문에 벤치에 앉아서 비로소 검색창을 켬)

- 'main wiktionary' 라고 검색했는데 와우, 생각지도 못하게 영어 'main'(메인)이 검색되었다.

- m, a, i, n이라는 문자열을 입력하며 영어 '메인'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불어 '손'만 생각했다는 게 왠지 기분 좋은 부분이다. 좀 언어덕후다운 거 같기도 하고.

- 그런데 아뿔사, 윅셔너리를 확인해 보니 라틴어 '손'이 형태는 manus가 맞지만 남성명사가 아니라 여성명사였구나.

(나는 라틴어에 대해 잘 모르고 그냥 대학 다닐 때 딱 한 학기 교양수업 들어 본 게 전부다.)

- manus는 복수 주격이나 단수 속격이 'manūs'가 되네? 내가 몰랐던 곡용 부류구나. 그냥 막연하게 남성명사 -us는 복수 주격이나 단수 속격이 -ī가 되는 것만 생각했는데. 여성명사 중에 이런 게 있었구나.

- 근데 라틴어 -us는 이탈리아조어(Proto-Italic) 단계에서 *-os였던 거 아닌가? 왜 윅셔너리는 manus에 대해서 이탈리아조어 단계의 선대형을 *manos가 아니라 *manus로 적어 놓았을까? 심지어 Old Latin 단계에서 manos가 문증되는 모양인데 왜지? 여성 단수 주격 어미 -us는 남성 단수 주격 어미 -us하고는 뭔가 다른 존재인 건가?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이상의 생각 흐름을 왠지 적어서 남겨두고 싶어져서 받아적어 두었다. 짧은 시간에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튀어나온다는 게 좀 재미있어서 ㅋㅋ

+ 한편 실제로 어떤 언어의 특정 어휘가 그 조상언어 및 형제언어의 대응 어휘와 문법성(grammatical gender)이 서로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 걸로 기억한다. 당장 떠오르지는 않는데...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기제가 뭔지 좀 궁금하다.